본문으로 바로가기
← 독립운동가 목록으로

권계홍

權桂洪

1871. 4. 9 ~ 1945. 2. 24

김판서 캐릭터 이미지

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권계홍

김판서는 역사 탐구를 돕는 가상의 AI 문화해설사예요.

추천 질문을 누르거나, 궁금한 내용을 직접 물어보세요.

0/200자
경북 안동(安東)의병

지도 위치

시·군·구 대표 지점

이 위치는 경상북도 안동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지도에서 보기 →

관련 단체

  • · 박처사 의진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후기의병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1990) 1871년 4월 9일 경상북도 안동군(安東郡) 임동면(臨東面) 대곡동(大谷洞, 현재 임동면 대곡1리) 해천마을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안동(安東)이고, 자는 계승(繼承), 호는 해암(海岩)이다. 이명은 권계홍(權桂弘)이다. 농업에 종사하다가 1907년부터 대곡동 출신 박인화(朴仁和), 일명 박처사(朴處士)가 이끄는 박처사의진에 참여해 의병 항쟁을 전개하였다. 박처사의진은 은일지사(隱逸志士)를 의미하는 처사(處士)로 자처한 박인화가 안동을 중심으로 이끌던 의병부대였다. 안동은 일찍이 1895년 을미의병을 일으킨 지역으로 항일 의식이 높은 지역이었다. 박인화는 1905년 을사늑약 이후 의병을 일으킨 이래로 1907년 2월 다시 활발한 의병 활동을 전개하였다. 여기에 1907년 일제의 고종 강제 퇴위와 군대해산으로 인해 전국적으로 정미의병(丁未義兵)이 일어나자 박처사의진의 활동 역시 본격화되었다. 박인화와 동향 출신으로 1907년부터 박처사의진에 소속되어 함께 활동한 것으로 보인다. 박처사의진은 주로 안동과 인접한 예안군(禮安郡)과 진보군(眞寶郡)·영양군(英陽郡) 등지에서 무장투쟁을 벌였다. 박처사의진은 300여 명의 병력으로 구성되었으면서도 소규모 부대로 흩어져 유격전을 벌이는 것이 특징이었다. 박처사의진에서 활동하며 이화서(李和瑞)·김문호(金文鎬) 등 동료 의병과 함께 소규모 부대원을 이끌고 친일 세력인 자위단(自衛團) 단원을 처벌하였고, 일본 경찰과 교전을 벌였다. 한편, 주변의 의병부대인 신돌석(申乭石) 의병부대, 류시연 의병부대과 연합 작전을 펼치기도 하였다. 류시연(柳時淵)은 같은 안동 사람으로 박처사의진과 함께 일본 경찰의 본진을 공격하였고, 때에 따라 부대원들이 연합하였다. 1907년 2월 류시연 의병부대와 박처사의진은 연합해 예안분파소(禮安分派所)를 공격하여 일본 경찰에 피해를 주었고, 9월 10일 영양에서 안동군분파소로 철수하고 있던 일본 순사 고모리(小森) 등과 교전하여 고모리를 포함한 일본 경찰 10여 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리기도 하였다. 1908년 1월 무렵 안동군 임동면의 편항(鞭巷, 현 임동면 중평리)에서 일본 경찰대와 교전을 벌이는 한편, 친일 세력인 류유호(柳溜鎬)를 구타하는 등의 항일 활동을 계속하였다. 이어 1월 21일 진보군(眞寶郡) 기곡동(基谷洞, 현 청송군 진보면 기곡리)에서 일본 군경과 교전하였고, 2월 예안·안동·의성에서 유격대 활동을 벌였다. 그러나 2월부터 전개된 일본군 수비대의 공격으로 류시연 의병부대 상당수가 체포되거나 귀순하면서 큰 타격을 입었다. 박처사의진도 세력이 약화되었고, 5월 3일 임동면 대곡리에서 대장 박인화가 교전 중 피살당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구심점을 잃은 소수 의병을 이끌고 항일 활동을 지속하였다. 1908년 8월 3일 의병 10여 명을 이끌고 총기와 도검(刀劍)을 휴대한 채로 고향인 임동면 일대를 돌아다니면서 일본 순사들과 교전을 벌였다. 8월 10일에도 수십 명의 의병과 함께 영양군 일대에 도착한 후 영양군 순사주재소(巡査駐在所)를 습격하는 등 대담한 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 이 무렵 박처사의진의 일원이던 김우철(金又喆)·박학실(朴學實) 등 10여 명이 안동 일대에서 의병의 재기를 도모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흩어진 의병을 다시 규합하기 위한 활동을 벌이던 중 체포되고 말았다. 체포된 뒤 순사 전성우(田聖愚) 등에게 심문을 받고 1908년 1월 27일 대구지방재판소로 넘겨져 임한천(林漢天) 등과 함께 법정에 섰다. 이른바 폭동 및 내란죄를 적용받았지만, 종범(從犯)이란 이유로 징역 3년 형을 선고받았다. 이에 항소하였으나 3월 27일 대구공소원에서 기각되어 대구형무소에서 복역하였다. 묘는 고향인 안동시 임동면 대곡1리 해천마을의 동암사 왼쪽에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김혜선⋮

국어사전

국어사전

원문에서 어려운 낱말을 선택하거나 직접 검색해 보세요.

낱말을 검색하면 뜻풀이가 여기에 표시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