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유성
朴裕成1907. 6. 30 ~ 1958. 11. 30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대통령표창(2000)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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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표창(2000) 1907년 6월 30일 전라남도 영암군(靈巖郡) 덕진면(德津面) 운암리(雲岩里)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함양(咸陽)이고, 박진상(朴珍相)이라는 이명이 있었다. 1931년 무렵 문사훈(文士勳) 등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청년회(靑年會)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1932년 영암 내 소작농들이 주도한 덕진면에서의 소작쟁의에 참가하였다. 일제강점기 영암을 비롯한 전남 일대의 토지는 일제 농업회사들과 대지주들이 대다수를 차지하였고, 소작농들에게 불리한 조건을 강요하거나 일방적으로 소작권을 박탈하는 폐단으로 인해 소작농들의 생활이 위협받고 있었다. 1932년 3월, 청년회원 문사훈·박수봉(朴壽奉)·신용주(愼鏞周)·신용점(愼鏞點) 등과 함께 덕진면 운암리에서 발생한 소작권 임의박탈 문제를 협의하였다. 3월 22일 밤 영암면 교동리(校洞里)의 청년회관에서 청년회원 수십 명이 모여 소작권을 빼앗긴 토지를 점거한 다음 청년회원들이 경작할 것을 결의하였다. 이에 동조한 청년회원들과 함께 3월 23일, 4월 30일, 5월 15일의 3회에 걸쳐 이를 실행하였다. 동시에 최판옥(崔判玉)·김판권(金判權) 등 영암의 공산주의자들은 소작권의 임의 이전에 반대하는 시위를 노동절(勞動節)인 5월 1일에 거행하기로 계획하였다. 그러나 일제 경찰의 감시로 인해 (음)5월 1일에 해당하는 6월 4일에 궐기하는 것으로 계획을 변경하였다. 운동 당일 영암 일대 농민들은 산유회(山遊會)를 명목으로 집합하여 시위를 개시하였는데, 이때 문사훈 등 70여 명의 농민과 함께 ‘소작쟁의만세’ 구호와 노동가를 제창하면서 운암리 일대를 행진하며 친일 지주와 새로이 소작권을 얻은 농민들의 집을 습격하였다. 이에 일제 경찰은 시위 참가자들을 붙잡기 위해 영암 일대를 검속하여 100명이 넘는 농민들을 검거하였는데, 이때 함께 붙잡혔다. 이후 소작쟁의를 사상 사건으로 간주한 일제에 의해 혹독한 고문과 조사를 받았고, 시위의 주도자 중 한 명으로 지목되었다. 1932년 7월 23일 장흥검사국을 거쳐 7월 29일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에 송치되어 형사재판에 회부되었다. 1933년 6월 22일 예심을 거쳐 9월 29일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에서 타인의 경작지를 무단 점거하였으며, 시위 과정에서 타인의 주거지를 침입하고 거주자를 폭행·협박하였다고 하면서,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 위반으로 징역 8월을 받았다. 이에 항소하였고, 1934년 3월 7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같은 사유로 징역 6월과 벌금 20원, 집행유예 3년을 받았다. 재판 이후 풀려났으나, 1932년 6월 이래 형무소에 구금된 상태에서 조사와 재판을 받았기 때문에 이 기간을 포함하여 약 1년 9개월 동안 옥고를 치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0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조범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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