朴基魯
朴基1871. 7. 15 ~ 1938. 1. 7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고령군 우곡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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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1990) 1871년 7월 15일 경상북도 고령군(高靈郡) 우곡면(牛谷面) 도진동(桃津洞)의 양반 가문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고령(高靈)이다. 1919년 4월 8일 우곡면 대곡동(大谷洞)의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가 붙잡혀 고초를 겪었다. 고령군 만세시위는 4월 6일 박재필(朴在弼)과 박영화(朴英華)가 우곡면 도진동 주민 50여 명을 결집시켜 독립만세를 선창하며 마을에서 우곡면사무소로 이동하면서 촉발되었다. 이날 도진동의 시위대는 우곡면장의 간청으로 해산하였지만, 날이 밝자 시위를 주도한 박재필·박영화를 비롯해 마을의 여러 사람이 일본 경찰에 붙잡혔다. 이어 4월 8일 우곡면에서는 만세운동과 같은 ‘불온’한 움직임을 경계하고자 시국강연을 열었다. 이에 불복한 박채환(朴採煥)은 오후 7시 30분 강연 후 해산하는 주민들을 설득해 만세시위를 재개하였으나, 역시 붙잡혔다. 4월 8일 오후 도진동의 4월 6일 만세시위가 진압되고 이날 참여한 여러 사람이 붙잡힌 사실을 이웃한 대곡동으로 가서 알렸다. 우선 한석구(韓錫九)를 만나 마을 주민을 모아 도진동의 만세시위에 연대해 독립만세를 외치자고 권유하였으나 설득하지 못하였다. 한석구의 집을 나와 김성원(金成源)의 주막 앞을 지나며 15~16명 정도가 모여 있는 것을 보고 이들에게 만세시위에 참여할 것을 제의하였다. 이들에게 국내 각지에서 만세운동이 벌어지고 있을 뿐 아니라, 이웃 마을 도진동에서도 만세시위가 벌어졌고 참여자들이 일본 경찰에 의해 붙잡혀 간 일이 있었음을 알렸다. 그리고 만세시위에 동참해 독립의 뜻을 실현하려 노력하면 독립이 가능하다고 설득하자, 한용발(韓用發)·한광룡(韓光龍)·도말용(都末用)·박용학(朴龍鶴)·한이군(韓二君) 등 10여 명이 동참하기로 결정하였다. 거사에 동참하기로 한 10여 명을 데리고 대곡동 주막 앞마당에서 독립만세를 선창하였다. 아울러 나팔을 불어 대곡동 주민의 관심을 집중시켰다. 그들의 뜻에 공감한 마을 주민 30~40여 명이 합류하였고, 이들의 선두에서 독립만세를 크게 부르며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이 사실은 곧 주재소에 알려졌고, 일본 경찰이 출동하였다. 다음날 아침 만세시위를 도왔던 한용발·한광룡·도말용·박용학·한이군 등과 함께 붙잡혔다. 1919년 5월 8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받고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이민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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