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화
朴根和1877. 12. 4 ~ 1921. 7. 9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대통령표창(2005)
관련 사건
- · 청양군 정산면 만세시위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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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표창(2005) 1877년 12월 4일 충청남도 청양군(靑陽郡) 목면(木面) 안심리(安心里)에서 태어났다. 이명으로 박성구(朴聖九)를 사용하였다. 1919년 4월 6일 청양군 정산면(定山面)의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가 붙잡혀 고초를 겪었다. 정산면의 만세운동은 백곡리(白谷里)의 홍범섭(洪梵燮)·임의재(任毅宰)·윤석희(尹錫禧)·홍세표(洪世杓)·박상종(朴商鍾) 등 유림의 주도로 시작되었다. 이들은 정산시장의 장날인 4월 5일 오후 서정리(西亭里)의 정산시장으로 나가 주민들에게 준비한 태극기를 나누어 주며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면서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일본 헌병이 즉각 출동하여 만세시위를 주도한 홍범섭 등 30여 명을 체포하여 헌병분견소로 끌고갔다. 일본 헌병의 만세시위자 체포에 분노한 주민들이 만세시위에 동참하면서 시위대는 700여 명으로 확대되었다. 이들은 헌병분견소로 달려가서 붙잡혀 간 사람들의 석방을 요구하며 격렬한 시위를 전개하였다. 이 과정에서 홍범섭 등 만세시위 주도자를 대신하여 선두에서 시위를 이끌던 정산향교(定山鄕校) 직원(直員) 권흥규(權興圭)가 일본 헌병의 발포로 현장에서 사망하였고, 만세시위는 해산되었다. 다음 날인 4월 6일 아침 권흥규의 친인척, 전날 만세시위에 참여했던 사람들과 함께 헌병주재소로부터 권흥규의 시신을 인수하여 고인의 자택이 있는 목면 안심리로 향하는 운구에 참여하였다. ‘배일사권공지구(排日士權公之柩)’라고 쓴 명정(銘旌)을 앞세운 운구 행렬은 지나가는 마을마다 상여를 멈추고 길 위에서 제사를 올렸다. 오후 5시경 목면 지곡리에 운구행렬이 도착했을 때 약 300명의 군중이 독립만세를 외쳤다. 만세시위대로 전환된 운구 행렬의 규모는 시간이 갈수록 더욱 커졌다. 밤에 안심리에 운구 행렬이 도착하자 시위대의 규모는 1,000명에 이르렀다. 일제는 만세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공주의 헌병대에서 헌병 1명, 보병 80연대 상등병 이하 6명 등을 안심리 방면으로 급파하였다. 이들 일본 헌병은 운구 행렬과 마주치자마자 무차별적으로 발포하였다. 이로 인해 권흥규의 조카딸과 명정을 쓴 권영진(權寧鎭) 등 여러 사람이 전날에 이어 사망하였고, 다수의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이 일로 일본 헌병에 붙잡혀 1919년 4월 21일 청양헌병분견소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태(笞) 90도(度)를 받았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5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한성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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