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광훈
朴光勳1882. 7. 11 ~ 1938. 5. 17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영월군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1990) 1882년 7월 11일 강원도 영월군(寧越郡) 양변면(兩邊面) 금마리(金馬里, 현 주천면 금마리)에서 출생하였다. 아버지는 양변면 면장을 지낸 박수창(朴受昌)이다. 1919년 4월 21일 영월군 양변면 금마리 주천(酒泉) 장날에 만세운동을 계획하고 주도하였다. 서울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난 이후 전국에서 만세운동이 거행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할 때마다 항상 지지를 보냈다. 그리고 고향에서도 만세운동을 일으키기를 결심하고, 뜻을 함께 할 사람들을 모으기 시작하였다. 1919년 4월 20일 오전 9시경 아버지 박수창의 집에서 처남 이용헌(李容獻)과 이병익(李炳翼)·박수영(朴受永)·박재호(朴在鎬) 등을 만나 금마리에서도 만세운동을 일으킬 것을 제안하였다. 이 제안에 이용헌·이병익 등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동의하면서,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게 되었다.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주천장터에서 만세운동을 펼치기로 하고, 박춘희(朴春喜)·김창진(金昌鎭)·박수찬(朴受燦)은 시위 때 쓸 태극기를 만들었다. 그런데 영월군수 석명선(石明瑄)이 농사 강화(講話)를 위해 4월 20일 마을에 강연하러 온다는 소식을 듣고 시위 장소를 군수가 연설할 강연장으로 바꾸고, 거사 날짜도 하루 앞당기게 되었다. 만세운동에 동참한다는 승낙 문서인 「만세연명부(萬歲連名簿)」를 만들어, 이를 가지고 각 집을 방문하여 시위 계획을 알리고 참여자들에게 서명을 받았다. 이렇게 치밀하게 시위 준비를 하였지만, 이날 군수가 오지 않으면서 실행에 옮기지 못하였다. 4월 21일 석명선 군수가 온다는 소식에 주동자들과 다시 모여 만세운동을 준비하였다. 장날을 맞아 장터로 향하는 사람들을 모아 시위 계획을 알리고 동참을 권유하였다. 그리고 주동자들과 함께 군중을 모아 금마리 길목에서 군수를 기다렸다. 오전 11시경 군수 석명선이 금마리에 도착하여 마을 지도자인 아버지 박수창에게 「만세반대자명부(萬歲反對者名簿)」에 서명할 것을 강요하였다. 박수창이 서명을 거부하자 군수 일행과 실랑이가 오고 가면서 마찰이 생기기도 하였다. 강연을 끝낸 군수가 금마리에서 주천리(酒泉里)로 가려고 할 때 이병익·박수영 등과 같이 군중을 이끌고 와서 군수 일행의 앞을 가로막았다. 군수에게 만세를 부르라고 하며 군수에게 태극기를 주었다. 군수가 처음에는 거부하였지만, 200명이 넘는 군중의 기세에 눌려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군수가 만세를 외치는 모습을 본 군중과 함께 소리 높여 ‘독립만세’를 연호하였다. 이어서 이병익과 함께 군수에게 「만세연명부」에 서명할 것을 강권하자, 군수는 마지못해 명부에 서명하였다. 일행인 군주사(郡主事) 민범식(閔範植)과 면서기(面書記) 지형태(池亨泰)도 서명하고 만세를 불렀다. 군수를 앞세워 마을과 주천장터를 돌며 만세시위를 펼쳤고, 이후 자진 해산하였다. 군수가 돌아가고 저녁이 되자, 주천헌병파견소 소장 나카호리(中堀)와 보조원 조병욱(趙炳旭)이 보병 5명을 데리고 금마리에 왔다. 이들은 「만세연명부」를 압수하고 주도자들을 구타하며, 명부에 서명한 사람들을 포함하여 모두 69명을 붙잡아갔다. 이 일로 1919년 5월 19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2년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고 항소하여 그 해 7월 7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원판결이 취소되고 징역 1년을 받았다. 이에 다시 무죄를 주장하며 상고하였지만, 같은 해 9월 18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어 서대문감옥에서 옥고를 치르던 중 ‘은사령’으로 1920년 4월 28일 풀려났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정상우⋮
국어사전
원문에서 어려운 낱말을 선택하거나 직접 검색해 보세요.
낱말을 검색하면 뜻풀이가 여기에 표시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