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찬호
閔瓚鎬1903. 3. 2 ~ 1950. 9. 26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대통령표창(2007)
관련 사건
- · 서울 남대문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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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표창(2007) 1903년 3월 2일 평안남도 양덕군(陽德郡) 양덕면(陽德面) 상석리(上石里)에서 태어났다. 1919년 만세운동 당시 보성고등보통학교(普成高等普通學校) 3학년으로, 서울 낙원동(樂園洞)에서 거주하였다. 1919년 3월 서울 남대문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1919년 3월 1일 서울 각지의 학생들은 손병희(孫秉熙) 등이 조선독립선언을 발표함을 전해 듣자 그 취지에 찬성하였다.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경 경성부(京城府) 파고다공원(현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을 발표하고 수천 명의 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이날 시위에 참가해 군중들과 함께 조선독립만세를 크게 외치며 행진하였다. 3월 5일 서울의 학생들이 학생단을 중심으로 남대문역(현 서울역) 앞의 광장에서 제2차 독립만세운동을 할 것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이에 찬동하며 적극 참여하였다. 3월 5일 오전 8시, 남대문역 앞 광장에는 학생들의 주도하에 수많은 시위 군중이 모여 있었다. 주도자인 강기덕(康基德)과 김원벽(金元璧)은 인력거를 타고 ‘조선독립’이라고 크게 쓴 깃발을 휘두르며 달려와 제2회 시위운동을 벌일 것을 선포하였다. 시위 군중은 일제히 독립만세를 소리 높여 부르면서 선두에 선 강기덕과 김원벽 등의 지휘에 따라 남대문으로 향하였는데, 적포(赤布)를 휘두르는 사람도 있었다. 3월 5일 아침 9시가 되자 미리 연락을 받은 많은 학생들이 모여들었다. 시위 행렬은 만세를 부르고 태극기를 흔들며 남대문 쪽을 향하여 행진하기 시작하였다. 4,000~5,000명에 달하는 시위대가 남대문 안으로 들어서자 경비 중이던 일제 군경이 이를 저지하였다. 시위대는 저지선을 뚫고 나아가면서 두 갈래로 나뉘어 시위를 계속하였다. 한 대열은 조선은행 앞을 거쳐 종로 쪽으로 향하였고, 또 다른 대열은 태평통(太平通), 대한문(大韓門) 앞, 황금정(黃金町) 1정목을 지나며 행진하였다. 그리고 조금 뒤 이 두 대열은 다시 보신각(普信閣) 앞에서 합쳐졌다. 일제 경찰은 칼을 휘두르며 해산을 종용하였고, 많은 학생들이 중상을 입고 연행되면서 시위대는 강제 해산 당하였다. 이때 동지들과 함께 붙잡혀 1919년 8월 30일 예심 결과 공판에 회부되었다. 같은 해 11월 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출판법 및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미결 구류 일수 중 90일 본형 산입)에 집행유예 3년을 받았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홍종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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