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이조
郭二祚1889. 12. 10 ~ 1951. 12. 10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산남의진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후기의병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1990) 1889년 12월 10일 경상북도 청하군(淸河郡) 남면(南面) 고현동(古縣洞)에서 태어났다. 고현동은 현재 경북 포항시 북구 청하면 고현리이며 이곳에는 지금도 현풍 곽씨가 문중을 이루고 있다. 본관은 현풍(玄風)이며 충익공(忠翼公) 곽재우(郭再祐)의 후손이다. 1907년 광무황제(고종)의 강제 퇴위, 한일신협약(정미7조약) 강제 체결, 대한제국 군대의 강제해산을 계기로 전국 각지에서 의병들이 일어났다. 이른바 후기 의병이라 칭하는 의병들은 일본군 토벌대와 직접적인 전투는 물론 의진(義陣)의 군자금 징발, 친일파 처단 등의 활동도 동시에 감행하였다. 이 무렵 동료 김봉조(金鳳祚)·곽덕산(郭德山) 등과 함께 흥해(興海) 지역에서 군수품 조달 임무를 맡아 활동하였다. 당시 경북 지방 영천(永川)·흥해·청하 일대에서 활동하던 대표적인 의병부대가 정환직(鄭煥直) 대장에 이어 최세윤(崔世允) 대장이 이끌던 산남의진(山南義陣)이었으므로 산남의진 의병으로 짐작된다. 김봉조·곽덕산 등과 함께 활동하던 시기가 일본군의 의병 탄압 작전으로 형세가 불리해진 정환직 대장이 1907년 (음)11월 4일 영일군(迎日郡) 북동대산(北東大山)에서 의병부대를 해산하면서 병사들에게 ‘개별적으로 식량과 복장 및 탄약을 구해서 관동(關東)으로 오라’라고 명하였던 시기와 일치하기 때문이다. 1907년 (음)11월 11일 밤 흥해군 북하면(北下面) 도항동(島項洞), 곧 현재의 포항시 북구 흥해읍 오도리(烏島里)의 박곡강(朴曲江)의 집으로 가서 “우리는 의병이다. 군수금 징발을 위해서 왔다”라고 하면서 군수금 제공을 요청하여 50원을 모금하였다. 이어 11월 13일 밤에는 흥해군 북상면(北上面) 벌제동(伐提洞), 곧 지금의 흥해읍 용천리(龍泉里)에 사는 부호(富豪) 고낙삼(高洛三)의 집으로 찾아가 군자금 지원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당시에는 돈이 없어 2~3일 뒤에 제공하기로 약속을 받고 돌아왔다가 다시 찾아가 군자금 100원을 징수하였다. 또 10일 뒤인 11월 23일 밤에는 흥해군 북하면 흥안동(興安洞, 현재의 흥해읍 흥안리)에 사는 오토성(吳土城)의 집으로 가서 ‘우리는 의병’이라고 하고 군자금을 요구하였다. 하지만 당시 가진 돈이 없어 4~5일의 여유를 주고 물러났다가 약속한 일자에 다시 찾아가 군자금 30원을 징수하였다. 1908년 2월 16일 오전 5시에 흥해군 북하면 백암동(白岩洞) 권기한(權紀翰)의 집에 들어가 군자금 지원을 요청하였으나 가진 돈이 없자 주찬(酒饌)만 대접받고 물러났다. 이번 일로 일본 경찰에 잡혀 이른바 강도죄로 1908년 8월 19일 대구지방재판소에서 징역 15년 형을 받고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권영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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