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자혜
朴慈惠1895. 12. 11 ~ 1943. 10. 16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간우회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간우회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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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1990) 1885년 12월 11일 경기도 고양군(高陽郡) 숭인면(崇仁面) 수유리(水踰里, 현 강북구 수유동)에서 중인 출신 박원순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와 결혼하여 슬하에 2남 1녀를 두었다. 어린 시절 궁궐의 수습 나인(內人)으로 생활하다가 1910년 12월 발표된 「이왕직(李王職) 관제」에 따라 궁녀 신분에서 벗어났다. 1911년 숙명여학교(淑明女學校) 기예과(技藝科)에 입학하여 1915년 졸업하였다. 졸업 후 사립 조산부양성소에서 교육을 받고 조선총독부 의원 산부인과 간호부에 들어가 조산원(助産員)으로 근무하였다. 조산원으로 근무하던 중 1919년 3월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인 이필주(李弼柱)와 연락이 닿아 만세운동에 참여하기로 하고, 동료 조산원과 간호사들과 함께 간우회(看友會)를 조직하여 각종 유인물을 제작·배포하였다. 또한 김형익(金衡翼) 등 한국인 의사들과 결의하여 태업(怠業)을 주도하다 붙잡혀 유치소에 수감되었다가 풀려났다. 풀려난 이후에는 병원을 그만두고 중국으로 건너가 1919년 베이징(北京) 옌징대학(燕京大學) 의예과에 입학하였다. 이듬해인 1920년 우당(友堂) 이회영(李會榮)의 부인 이은숙(李恩淑)의 중매로 신채호를 만나 가정을 꾸려 이듬해 첫째 아들 신수범(申秀凡)을 출산하였다. 1922년 경제적 어려움으로 첫째 아들을 데리고 귀국하였다. 국내로 돌아와서 서울 종로구(鐘路區) 인사동(仁寺洞)에서 ‘산파 박자혜’라는 간판을 내걸고 산파업으로 생계를 유지하고자 했으나 녹록치 않았다. 국내에서 생계를 이어가면서도 신채호와 계속 연락을 주고받으면서 국내 인사들과 중국 내 인사들의 가교 역할을 하였다. 1926년 12월 나석주(羅錫疇)가 동양척식주식회사와 식산은행에 폭탄을 투척하기 위해 서울에 왔을 때 산파원에 폭탄을 숨겨주고 나석주의 길잡이 역할을 담당하였다. 1936년 2월 21일 신채호가 중국 뤼순감옥(旅順監獄)에서 순국하자 2월 24일 유해를 모시고 왔다. 이후 첫째 아들을 해외로 보내고 1942년 둘째 아들 신두범(申斗凡)이 세상을 떠나자, 홀로 셋방에 살다가 1943년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서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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