白樂疇
白疇1888. 12. 18 ~ 1965. 12. 29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대한독립단
- · 대한통의부
- · 의군부
포상 정보
- · 독립장(1963)
관련 사건
- · 흥경현보민회습격사건
- · 구성금광습격사건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독립장(1963) 1888년 12월 18일 평안북도 정주군(定州郡) 갈산면(葛山面) 광동동(光東洞)에서 백병제(白昺濟)의 아들로 태어났다. 자는 학범(學範)이며, 호는 세창(世昌), 이명은 백운기(白雲起)이다. 활동 당시 ‘백호대장’으로도 불렸다. 1919년 정주군에서 만세운동에 참가했다가 피신 생활 끝에 그해 7월 만주로 망명하였다. 1920년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에 가입해 총대장 이웅해(李雄海)의 휘하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1921년 싱징현(興京縣) 본계호(本溪湖)·무순현(撫順縣) 방면에서 외무감독으로 활동하였으며, 군자금 모집과 친일 주구배 토벌 등에 주력하였다. 10월 15일 나정구(羅正龜)·현병화(玄炳化)·장지숙(張志淑) 등과 모젤식 권총과 오연발 장총 등을 휴대하고, 선전활동을 마치고 싱징현으로 돌아가던 부일단체 보민회 간부들의 마차를 습격하였다. 당시 마차에는 오가와(小川) 감독, 보민회 총회장 이인수(李寅秀), 지부회장 백형린(白衡麟), 조사주임 이정근(李貞根)을 포함한 서기와 간사 등 보민회원들과 나카시마(中島) 순사 등 일제 경찰들이 타고 있었다. 대원들은 오가와 감독과 악명 높은 친일파 백용범(白用範)을 처단하고, 현금 1,400여 원과 장총·시계·가방 등을 노획하였다. 이후 권덕근(權德根)·나정구 등과 함께 혈성대(血誠隊)를 조직해 일본관청을 습격하고, 친일단체인 일민단(日民團)·강립회(强立會)·보민단 등을 공격하는 등 친일파 처단에 노력하였다. 1922년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가 발족할 때 김창빈(金昌賓)·고민제(高民濟)·한봉조(韓鳳朝) 등과 법무부원으로 임명되었다. 법무부장에는 현정향(玄正鄕), 부감에는 박규수(朴奎洙)·박태수(朴泰洙)가 피선되었다. 1923년 대한통의부 소속으로 카이위안현(開原縣)·톄링현(鐵嶺縣)·펑톈현(奉天縣)·번시현(本溪縣) 등 만철연선(滿鐵沿線) 부근에 거주하는 한인들의 자치권 보호와 일제 경찰의 경계 상황 등을 정찰하였다. 1924년 8월 8일 나정구·최진진 등 대원 10여 명을 이끌고 국내로 들어와 평북 구성군(龜城郡) 관서면(館西面) 조악동(造岳洞)에 있는 최창학(崔昌學) 소유의 삼성금광(三城金鑛)을 습격하였다. 삼성금광은 국내 최대의 금광으로, 대원들은 현금과 금괴 등 약 2천여 원어치의 거금을 빼앗아 본부로 돌아갔다. 이후 대한통의부에서 분리된 의군부(義軍府) 소속으로 활동하였다. 1925년 9월 고향인 정주로 돌아와 백낙술(白樂述)과 함께 단총을 휴대하고 서면(西面) 서호동(西湖洞)에 사는 이인규(李寅奎)로부터 군자금 20원을 모집하는 등, 정주를 중심으로 군자금 모금에 주력하였다. 이어 일제 경찰의 추격을 피해 만주로 돌아갔다. 이후 몽고로 피신했다가 1928년 3월 싱징현으로 돌아왔는데, 공성환(孔成煥)이란 인물의 밀고로 그해 5월 허벅지 대퇴부에 총상을 입고 붙잡혀 12월 신의주로 압송되었다. 1932년 3월 28일 신의주지방법원에서 무기징역을 받고, 경성형무소와 서대문형무소, 대전형무소에서 옥고를 겪던 중 광복을 맞이하여 출옥하였다. 이후 고향인 정주로 갔다가 1948년 4월 월남해 부산 범일동(凡一洞)에 정착하였다. 월남한 삼남 백삼욱과 살며 광복동지회, 3·1동지회 부산지회장을 지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 ⋮박걸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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