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인명사전 - 한국독립운동정보시스템
1885. 12. 29 ~ 1967. 11.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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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독립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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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립장(1963)
독립운동 활동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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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장(1963) 1885년 (음)12월 29일 경기도 가평군(加平郡) 군내면(郡內面) 향교리(鄕校里)에서 아버지 신석범(申錫範)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고령(高靈)이며, 아명은 연길(連吉), 초명은 태봉(泰鳳)이다. 이명은 태련(泰鍊)· 태치(泰癡)이고, 호는 강재(岡齋)·시정(是丁)·치정(癡丁)이다. 어려서는 한학을 수학하였고, 이규봉(李圭鳳)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16세에 가평군 군내면 약정대리(約正代理), 17세에 북면, 18세에는 외서면 약정(約正)(지금의 면장)을 거쳐 가평군 서기로 근무하였다. 19세 되던 1903년 4월 강원도 양구군 청송리의 의병장 최도환(崔道煥)의 둘째 딸 최백경(崔百卿)과 혼인하였다. 정치에 관심을 갖고 있던 중, 1903년 12월 1일 동학(東學)에 입도하였다. 1904년 동학교단에서 진보회(進步會)를 조직하고 흑의단발(黑衣斷髮)하는 갑진개화운동(甲辰開化運動)을 전개하자 1905년 봄 상경하는 단발을 하였다. 생계를 해결하기 위해 경무청 순검(巡檢)으로 몇 달을 근무한 바 있으며, 『국민일보(國民日報)』에도 입사하였으나, 반년 만에 사표를 내고 그만두었다. 1907년 봄 탁지부 인쇄국 교정원으로 들어가 약 4년간 근무하였다. 이 시기 김남수(金南壽)·김남규(金南奎) 등과 함께 청파동(靑坡洞)에 문창학교(文昌學校)를 설립한 후 교감으로 취임하여 육영사업을 하였다. 또 안중근(安重根)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저격하였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정한교(鄭漢敎)와 함께 일진회장 이용구(李容九)를 처단하려 하였으나 실행에 옮기지는 못하였다.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 이후 천도교(天道敎)에 투신하여 천도교 종학강습소 강사, 천도교중앙총부 도사실 서계원(庶計員), 1914년 천도교 대구대교구장, 1917년 천도교중앙총부 대종사 종법원(宗法員) 겸 의사원(議事員)으로 활동하였다. 1919년 2월 27일 천도교에서 경영하는 보성사(普成社) 사장 이종일(李鍾一)의 지휘 아래 독립선언서 교정과 인쇄에 참여하였으며, 독립선언서를 이종일의 집까지 운반하였다. 3·1운동 이후 김가진(金嘉鎭)·전협(全協)·최익환(崔益煥) 등이 조직한 대동단(大同團)에 가입하였다가 종로경찰서에 잠시 구금되기도 하였다. 만세운동으로 국내외 임시정부 수립운동 과정에서 천도교 측 연락 임무를 띠고 활약하였다. 5월 1일 이인숙(李仁淑)·정광조(鄭廣朝) 등 천도교 간부 28명과 함께 경성헌병사령부에 붙잡혔다가 풀려난 뒤 국외 망명을 결심하였다. 1920년 봄 상하이(上海)의 대한민국 임시정부로부터 천도교 대표를 파견해 달라는 요청에 따라 그해 4월 23일 신상태(申相泰)와 함께 만주를 거쳐 상하이로 망명하였다. 임시정부에서 활동할 것을 권유받았지만 안창호(安昌浩)를 만나 만주지방에서 독립운동자금 조달을 위한 개척회사 설립을 제의하였다. 안창호가 이를 승낙하자 자금 200원을 확보하기 위해 동지들을 국내와 다롄(大蓮)으로 파견하였다. 그러나 다롄에서 미곡상으로 활동하던 동지가 붙잡혀 독립군자금 모금 사업은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당시 상하이에는 천도교에서 파견한 최동오·김의종·김홍선(金弘善)·장경순·이민창 등 교인이 프랑스 조계 하비로(霞飛路) 보강리(寶康里)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이들과 함께 천도교상해전교실(天道敎上海傳敎室)을 설립하였다. 이와 더불어 천도교 이념에 따른 통일당(統一黨)을 조직하여 총리로 활동하였다. 만주 각처에 독립단체가 난립하여 서로 알력이 생기는 등 어려움이 적지 않자 1920년 9월 상하이를 떠나 베이징(北京)으로 활동무대를 옮겼다. 베이징에서 신채호(申采浩)·박용만(朴容萬) 등과 교류하면서 군사통일촉성회(軍事統一促成會)를 조직하였다. 1921년 4월 러시아·북만주·하와이와 국내 등지에서 8개 단체의 대표가 베이징 삼패자화원(三牌子花園)에서 군사통일회의를 개최하였다. 이때 통일당 대표로 참석하여 의장으로 선출되었으며, 박용만·강구우(姜九禹) 등은 독립운동의 최고기관으로서 군정부(軍政府)를 구성하였다. 신성모(申性模)·황학수(黃學秀) 등과 함께 통일당의 대표 자격으로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의 해산을 요구하는 결의문에 서명하였다. 1923년 1월 국민대표회의(國民代表會議)가 각급 독립단체 대표 140여 명이 모여 상하이에서 개최되었을 때 안창호·지청천(池靑天)·김철(金鐵)·원세훈(元世勳) 등과 함께 순국선현추모행사 준비위원으로 선출되었으며, 국민대표회의 회규기초위원에도 선출되었다. 1월 31일 국민대표회의 개막식에서 안창호·김마리아 등과 함께 연설하였으며, 의정기초위원에 선임되었다. 3월 1일 개최된 3·1운동 기념식에서는 여운형(呂運亨)과 함께 기념사를 하였다. 국민대표회의 기간 동안 창조파(創造派)의 중심 인물로서 임시정부를 대체할 새로운 정부를 조직하려고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창조파가 국호를 ‘한(韓)’이라고 칭한 신정부를 수립하고 국민위원회(國民委員會)를 조직할 때 내무위원장에 선임되었다. 1923년 8월 20일 국민대표회의에서 결정된 사항을 해결하기 위해서 김규식(金奎植)·지청천·윤해(尹海)·원세훈 등과 함께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하였다. 이곳에서 코민테른 극동부 대표 파인버그(Joseph) (Fineberg)를 비롯하여 한명세(韓明世) 등과 여러 차례 협상 끝에 원조를 약속받았다. 그러나 코민테른이 약속을 이행하지 않음에 따라 1925년 3월 초 만주로 돌아왔다. 당시 만주 교포사회는 정의부·신민부·참의부로 정립되어 있었고, 국제공산당과 교섭에도 실패함에 따라 민족운동을 전개하는데 적지 않은 어려움이 있었다. 이에 천도교의 포교사업에 전념하였다. 이름을 숙(肅)에서 태치(泰癡)로 고친 후 어무현(額穆縣) 자오허(蛟河)에 정착하여 천도교 납법구종리원(拉法溝宗理院)을 설립하고 새로운 운동방략을 모색하였다. 1926년 부친을 비롯한 가족과 하얼빈(哈爾濱)에서 고국을 떠나지 6년 만에 재회하였다. 이후 가족들과 하얼빈·이도하자(二道河子) 등지의 중국인 농장에서 생활하다가 1927년 2월 이도하자 부근의 송봉산(松峰山)에 정착하였다. 이곳에서 신창학교(新昌學校)를 설립하고 교장으로 취임하는 한편 현지 한인농장을 연합하여 자치회를 조직하고 위원장에 선임되었다. 1928년 1월 신민부 민정위원장 최호(崔灝)가 찾아와 신민부·정의부·참의부의 통합을 위해 신민부의 전권대표로 활동해 줄 것을 요청하자 이를 수락하고 신민부 민정위원 자격으로 삼부통합운동(三府統合運動)에 참여하였다. 1930년 7월 중동선 위하현(葦河縣)에서 신민부 지도자를 중심으로 이당치국(以黨治國)에 입각한 독립운동 정당으로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을 창당할 때 ‘민본정치(民本政治)의 실현, 노본경제(勞本經濟)의 조직, 인본문화(人本文化)의 건설’ 등 3대 강령과 정치이념을 제공하는 등 적극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한국독립당의 무장부대인 한국독립군(韓國獨立軍)의 참모장으로 선임되었다. 1931년 9월 18일 만주사변으로 한국독립당이 중국군과 항일연합작전을 전개하기로 하자 한국독립당과 한국독립군 대표자격으로 남대관(南大觀)과 함께 길림자위군(吉林自衛軍), 호로군 연합사령부(護路軍聯合司令部)와 접촉하여 한중연합전선(韓中聯合戰線) 결성을 합의하였다. 한국독립군은 길림자위군 중로연합군(中路聯合軍) 제3군 독립영(獨立營)으로 편제되었고, 이때 참모직을 맡았다. 이어 한국독립군은 중국구국군(中國救國軍) 보병 제8여단 23단 스스잉(柴世榮) 부대와 연합하여 중한토일연합군(中韓討日聯合軍)을 결성하고 경박호·팔도하자·동경성·양모림·대전자령 전투 등을 승리로 이끌었다. 그러나 일본군과 만주군의 대공세와 한인사회의 와해, 한국독립군과 동북항일의용군 일부 부대와의 갈등으로 한국독립군은 일단 해산하고 중국 관내지역으로 이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끝까지 남기 원하는 40여 명의 독립군을 이끌고 우창시엔(五常縣) 사하자(沙河子)의 자치단장 심경산(心慶山)의 도움으로 한인 농촌에 분산 주둔하면서 겨울을 보냈다. 여기서 독립군을 유지하는 방법은 중국 국민당 정부와 반만항일세력 지원, 김구 등 한인세력과의 연합이 최선이라고 판단하고 중국정부 고위층과 면담을 추진하였다. 국민당 정부 군사위원회 주배덕(朱培德)으로부터 면담통지를 받은 후 난징(南京)에서 중국정부의 후원과 협조를 구하였으나 성사되지는 못하였다. 중국 항일부대의 마잔산(馬占山)·수빙웬(蘇炳文)·왕더린(王德林)·공헌영(孔憲榮) 등이 유럽을 순방하고 상하이로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자, 이범석(李範奭)을 통해 왕더린 부대의 부대장 공헌영과 면담하여 600원의 지원금을 받았다. 아울러 미국에서 독립운동자금을 모금해 온 김규식으로부터 ‘한국독립군 지원자금’이란 명목으로 500원을 지원받자, 8월 초순 베이징으로 가서 한국독립군 총사령관 지청천에게 전달하였다. 1933년 11월 베이징에서 차남 화균(化均) 등 가족과 합류하였다. 화균은 중국 육군군관학교 낙양분교(洛陽分校)의 한인특별반에 입교하였으며, 1934년 3월 베이징으로 이주하였다가 1935년 2월 무렵 향산자유원 자위대장 최용철(崔用哲)의 도움으로 향산문두촌(香山門頭村) 정홍기(正紅旗)로 이거하였다. 노모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원균과 함께 만주로 가다가 12월 4일 잉커우(營口)에서 일제 형사대에 붙잡혔으나 보름 만에 석방되었다. 1935년 3월 일납계(一拉溪) 농촌으로 돌아온 후에도 일제의 감시 속에서 연금생활을 하였다.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아 한인들의 안전을 도모하고 귀국을 돕는 일을 적극 추진하였다. 8월 26일 차남 화균의 안내로 지린(吉林)의 조선인대표 두 명이 찾아와 만주 일대에서 곤경에 처한 교포들의 문제를 처리해 달라는 요청을 받고 다음날 지린성 동영학교(同榮學校)에서 개최된 길림조선인회(吉林朝鮮人會) 결성대회에서 회장으로 추대되었다. 이후 소련군정 하에서 밀려드는 피난민의 수습과 귀국희망자의 알선, 그리고 약탈과 강간 등 소련군의 만행을 저지하기 위해 소련군사령부를 직접 방문·항의하고 대책을 수립하는 등 민심 안정에 전력하였다. 10월 15일 창춘(長春)에서 만주지역 한인들이 교포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 동북한국민연합회(東北韓國民聯合會)를 결성하자, 회장으로 추대되었다. 1946년 8월 펑톈(奉天)에서 개최된 동북한국교민회총회(東北韓國僑民會總會)에서 총회장으로 선출되어 펑톈과 베이징 등지의 중국 정부기관을 오가며 한인의 귀국을 위해 동분서주하였다. 이외에도 11월 초순 톈진의 미군정출장소를 방문하여 한인의 귀국 문제를 논의해 좋은 결과를 얻기도 하였다. 그러던 중, 미군정출장소로부터 마지막으로 연내에 귀국하는 난민수송선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해 12월 20일 부산으로 귀국하였다. 귀국 후에는 미군정과 남조선과도입법의원 등을 상대로 중국에 남아있는 한인들의 귀국을 위해 노력하였다. 1947년 3월 동북한인교민대표 자격으로 ‘재만 동포의 구출 및 재산반환 교섭’을 촉구하는 청원서를 과도입법의원에 제출하였다. 이어 4월 김규식 입법위원 의장의 권유로 입법의원이 된 후에도 조사단 구성 등 재중한인의 귀환을 위해 노력하였다. 1947년 6월 천도교보국당(天道敎輔國黨) 대표로 좌우합작위원회(左右合作委員會) 위원으로 선임되었으며, 1948년 3월 민족자주연맹(民族自主聯盟) 중앙상무위원으로 선출되었다. 그리고 4월 11일 김구·김규식·이극로·홍명희·원세훈과 함께 남북연석회의(南北連席會議) 연락원 자격으로 남북협상을 위해 평양까지 갔다 오는 등 남북분단 저지를 위해 최선을 다하였다. 논저로는 회고록 『나의 일생』과 「경북동덕에게」·「천의 성공과 대신사의 득도」·「수도지요는 재어내수도」·「송영의 감」·「이심치심」 등이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 ⋮성주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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