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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의배

徐義培

1898 ~ 1923. 6.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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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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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해 서흥(瑞興)국내항일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황해도 서흥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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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단체

  • · 주비단 평산지부

포상 정보

  • · 독립장(1968)

관련 사건

  • · 주비단 사건
  • · 유창렬 사건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독립장(1968) 황해도 서흥군(瑞興郡) 화회면(禾回面) 신막리(新幕里) 출신으로, 황해도 평산군(平山郡) 적암면(積岩面) 갈산리(葛山里)에 거주하였다. 1923년 5월 10일에 선고된 고등법원 판결문에 당시 나이가 26세로 기록된 것을 볼 때, 1898년생으로 추정된다. 이명으로 서일배(徐一培)를 사용하였다. 1920년대 초 평산에서 주비단(籌備團) 평산지부(平山支部)에 가입하여 군자금 모집, 친일파 처단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주비단 평산지부는 1920년대 초 황해도 각지에서 군자금 모집 활동을 주도했던 임시군사주비단(臨時軍事籌備團, 일명 주비단)과 같은 맥락의 조직으로 보인다. 당시 황해도의 주비단 조직은 일반적으로 10명으로 분단(分團)을 만들고 그 위에는 소단(小團)과 연단(聯團·大團)을 두었으며, 사령관이 전체 조직을 통솔하는 형태를 취하였다. 황해도 주비단 사령부(司令部) 산하에 평산지부가 결성된 것은, 1920년 (음)7월 15일이었다. 평산군 출신의 민승현(閔昇顯)이 중국 상하이(上海)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수립 상황, 이를 계기로 독립을 목적으로 한 다수의 단체가 조직될 것이라는 점, 민승현 자신이 주비단의 평산군 대단장(大團長)으로서 단원을 모집하고 있다는 점 등을 유상렬(柳相烈)에서 설명한 데서부터 평산지부의 활동이 시작되었다. 이때 민승현은 유상렬에게 『독립신문』과 임시정부에서 발행한 공채권(公債券) 외에 다수의 서류를 보여주었고, 3·1운동에도 참여했던 유상렬은 주비단에 가입하여 함께 동지를 모집하게 되었다. 1920년 (음)7~8월 평산군 문무면(文武面) 화랑리(花浪里)에 있는 민승현의 집에서 민승현과 재령(載寧)에 사는 김치화(金致華)의 권유로 주비단 평산지부에 가입하였다. 같은 해 11월 민승현은 황해도 주비단본부의 특파위원인 김치거(金致擧)로부터 평산군 내에서 독립군자금을 모집하여 상하이의 임시정부에 송부해야 하니 하루빨리 인근의 자산가들에게 군자금 제공을 권유해 달라는 요청이 왔다고 유상렬에게 전하였다. 그리고 유상렬이 김치거로부터 받은 군자금 「통지서」, 「영수증」, 「경고문(警告文)」 등 각종 문서를 전달해주었으며, 이 문서들을 가지고 유상렬 등과 함께 인근의 부유한 사람들을 주선해주거나 직접 「통지서」 등을 배포하였다. 민승현의 명령을 받는 유상렬을 믿고, 유상렬의 지휘를 따르며 단원으로서 활동하였다. 1921년 (음)2월 23일 유상렬이 조창선(趙昌善)과의 만남을 주선해달라는 요청을 하자 이를 받아들여, (음)3월 11일 세곡면(細谷面) 수동리(修洞里) 문암동(文岩洞)에 있는 유상렬의 자택에서 회합하였다. 세 사람은 세곡면 은동리(隱洞里)에서 주점(酒店)을 하고 있는 조태희(趙泰熙)의 집으로 함께 갔다가, 저녁에는 문암동 유근환(柳根煥)의 집에서 다수가 모임을 가졌다. 모임을 마치고 돌아가던 중인 (음)3월 12일 새벽 세곡면 수동리 거리에서 유상렬·조창선과 함께 마산면(馬山面) 입암리(立巖里)에 사는 밀정(密偵) 이칠성(李七星)과 이범락(李範洛)을 처단하였다. 이 일을 계기로 같은 해 (음)5월 26일 유상렬이 체포되었다. 한편 주비단의 평산군 대단장을 맡았던 민승현은 다른 지역으로 출장을 가게 되면서 장남 민치영(閔致榮)을 평산에서 활동하도록 하였다. 이에 따라 주로 민치영·조창선과 함께 군자금 모집 활동을 벌이게 되었다. 1921년 (음)4월 이후 세곡면 수동리 고릉산(古陵山) 등지에서 유상렬·민치영 등 십 수 명의 단원들과 협의하면서 평산군 내 각 면의 부유한 자산가들을 중심으로 임시정부에 발행한 공채증권(公債證券) 또는 군자금 「통지서」 수십 매를 배포하였다. 이때 유상렬로부터 배부할 「통지서」와 「영수증」의 절반을 맡아 가져가서, 조창선과 함께 고지면(古之面)과 적암면을 중심으로 배부하였다. 얼마 후 임시정부와 연결되어 있던 유상렬·김치화의 명령으로 군자금을 낼 뜻이 있는 자산가들로부터 직접 금전을 수령하고 영수증을 건네주었다. 당시 유상렬은 세곡면을 맡아 배부하였으나, 별로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모두 자신의 재적지(在籍地)나 거주지 면을 중심으로 군자금 모집을 분담한 것을 보면, 각자 같은 마을에 사는 지인들 가운데 자산가들을 대상으로 활동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1921년 (음)4월 11일경 조창선과 함께 고지면 달성리(達城里)에 있는 조천효(趙天效)의 집을 찾았을 때는, 사전에 400원의 군자금 통지서를 보냈지만 조천효가 평소 친밀한 관계였던 이들을 보게 되어 반갑다고 하면서 현재 30원밖에 없다고 하니 일단 30원의 군자금만 모집하고 나왔다. 같은 날 원래 알고 지내던 관계인 달성리의 조천극(趙天極)·조용선(趙用善)·조달선(趙澾善)의 집을 방문했을 때도 이들이 준비해놓은 금액만 모집하였다. 또 같은 해 (음)5월 3일경 고지면 세관리(洗冠里)에 있는 신재환(申載煥)의 집에서 동일한 방식으로 군자금을 모집하였다. 이렇게 순조로운 방법으로 군자금을 모집했음에도 불구하고 통지서를 받은 자산가나 구장(區長)들 가운데 이 일을 일제 경찰에 밀고하는 경우도 생겼다. 1921년 (음)10월 4일 조창선·민치영과 함께 평산군 세곡면 군동리(群洞里)에 있는 양재성(梁在星)의 집으로 가서 군자금을 요구하였다. 양재성이 이에 응하지 않자 직접 그에게 총을 발사하면서 “돈을 준비하라”고 강력히 요구하였다. 같은 해 (음)11월 4일 오전 7시경 세곡면 수동리 이만석(李萬石)의 집에 숨어있던 중에 경찰이 습격하여 발포하자 맞대응을 하면서 총격전이 벌어졌다. ‘강도범’을 체포하라는 남천경찰서장의 명령에 따라 도(道) 순사 호리오(堀尾秀彦)와 미조구치(溝口良治) 외 4명이 발포하자 유일하게 권총을 소지하고서 이 두 순사에게 직접 총을 발사하고 도주하였다. 하지만 일제 경찰의 총격에 부상을 입었고, 결국 동지 조창선·민치영과 함께 붙잡혔다. 일제 경찰에 검거된 후 조사 과정에서 밀정 이칠성과 이범락의 처단은 유상렬이 단독으로 한 것이라며 혐의를 부인했지만, 유상렬이 단독으로 2명을 처단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본 일제경찰과 사법부가 수용하지 않았다. 1922년 7월 15일 해주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정치에 관한 범죄 처벌의 건’과 총포화약류취체령 위반과 살인 등으로 조창선과 함께 사형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항소를 제기하였으나, 몇 차례의 공판 연기 끝에 1923년 1월 30일 평양복심법원에서 기각되었다. 재차 상고하였으나, 같은 해 5월 10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었다. 그 해 6월 11일 평양형무소에서 동지 조창선과 함께 형 집행으로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변은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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