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인항
朴仁恒1898. 2. 2 ~ 1947. 3. 7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대한청년단 선천지부
- · 상하이 임시의정원
포상 정보
- · 독립장(1977)
관련 사건
- · 대한청년단 선천지부
- · 상하이 임시의정원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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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장(1977) 1898년 2월 2일 평안북도 선천군(宣川郡) 태산면(台山面) 원봉리(圓峯里)에서 태어났다. 일제가 창씨개명을 강요하자 목호인항(木戶仁恒)을 썼다. 형 박인혁(朴仁赫)과 동생 박인각(朴仁覺)도 함께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 1920년 2월경 선천에서 박병익(朴炳翼)의 주도로 조직된 대한청년단(大韓靑年團)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일명 독립청년단이라고도 불린 대한청년단은 만세운동이 일어난 1919년 3월 중국 안둥현(安東縣)에서 안병찬(安秉瓚)을 총재로 결성된 단체로, 평안북도 출신의 청년들이 다수 참여하였다. 상하이(上海)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독립운동자금 모금과 조달, 파리강화회의에 파견된 대표자의 후원, 임시정부의 정책과 정령(政令)을 선전하는 기관지인 『반도청년보(半島靑年報)』 발행 등이 주요 활동이었다. 같은 해 9월경 안둥현의 일제 경찰에 조직이 발각되어 활동이 일시 정지되었다가, 11월 콴뎬현(寬甸縣)에서 조직된 대한청년단연합회(大韓靑年團聯合會)로 흡수되었다. 중국 안둥현에서 대한청년단이 발각되던 1919년 9월, 평안북도 선천 출신의 박병익이 대한청년단 서무부원 지응진(池應振)과 협의하여 국내의 선천읍(宣川邑)에 독립청년단 지부를 설치하기로 결정하였다. 이에 박병익은 같은 달 말경 선천군 내에 거주하던 전용석(田龍錫)·박치흠(朴致欽)·박만채(朴晩采)·박천규(朴天圭)·김경두(金景斗)·김용채(金龍采)·계창림(桂昌林) 등을 동지로 규합하였다. 그리고 박병익을 지단장(支團長)으로 하여 대한청년단 선천지부(宣川支部)가 조직되었는데, 1920년 2월부터 엄승도(嚴承道) 등과 함께 여기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당시 대한청년단 선천지부에 가입하여 활동하던 엄승도·박인식(朴仁植)·박만옥(朴萬玉)·박규명(朴奎明)·박인혁(朴仁赫) 등도 모두 같은 고향인 태산면 원봉동 출신들이었다. 이때부터 같은 해 4월경까지 선천군 내 각지에서 대한청년단의 취지를 설명하고 독립운동자금의 모집을 권유하였다. 그 결과 단원 수십 명을 규합하고 운동자금 1,200원을 모집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가입 직후인 1920년 2월 상순경 대한청년단 통신부장으로 임명된 엄승도로부터 박병익이 보낸 독립운동에 관한 편지 등을 전달받았다. 이를 태산면·남면(南面)·군산면(郡山面) 등 3면에 배부하기로 하고, 엄승도와 함께 계창옥(桂昌玉)·전용석(田龍錫)·김봉제(金鳳濟) 등 여러 사람에게 배포하였다. 1920년 3월 14일에는 동지 허승호(許承浩)의 부탁을 받은 엄승도와 함께 원봉동 자택에서 『독립신문』 배부에 관해 협의하였다. 그날 만주에서 들어온 대한청년단원 일명 이운곡(李雲谷)인 백운한(白雲翰)·유영춘(劉永春)·황모(黃某) 등 3명이 원봉동 자택을 방문하여 군자금을 요청하자, 박근명(朴根蓂)이 500원을 제공하도록 알선해주었다. 이 자리에서 친형인 박인혁이 군자금은 얼마든지 제공할 수는 있지만, 친일파인 면장(面長) 김병준(金炳畯)이 알게 되면 곧바로 일제 경찰에 신고할 것이 우려된다고 하였다. 태산면장 김병준은 원래부터 악질적인 행태로 인근의 원망을 사고 있었다. 형 박인혁과 함께 김병준에 대해 일찍부터 큰 불만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다른 형제와 같이 1918년 3월 20일 면장에 대한 불평을 모두 기록하여 평안북도 당관에 신고를 한 적이 있었다. 당국에서는 오히려 이들을 무고죄(誣告罪)로 평양지방법원 신의주지청으로 넘겼다. 검찰에서는 다행히 무죄로 석방되었지만, 이때부터 이들에 대한 면장의 감시와 보복은 더욱 심해졌고 이들의 불만도 극에 달한 상태였다. 이들의 활동은 수시로 일제 경찰에 밀고되고 있던 상황이었고, 그래서 박인혁·엄승도 등과 함께 이번 기회에 악질적인 면장을 처단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1920년 3월 14일 자택의 모임에서 엄승도가 면장을 살해하면 독립운동자금의 모집이 수월할 것이라고 바로 제안하여, 백운한·유영춘·황모 등 3인과 박규명·박만옥 등을 불러 함께 태산면장 김병준을 처단하기로 결정하였다. 다음 날인 3월 15일 아침 동지 10여 명과 함께 태산면사무소(台山面事務所)를 기습하였다. 백운한 등은 태산면장 김병준과 서기 김은기(金殷基)를 불러내어, 이들에게 「독립선언서」를 보여주며 “일본 정부에 충성을 다하여 독립운동을 방해함은 실로 못 쓰는 일”이라고 소리 높여 질책하였다. 그리고 1919년 만세운동 당시 독립운동을 방해하는 등의 친일 행위도 질책한 후 군자금을 내라고 요구하였다. 이에 면서기로부터 국세(國稅) 등 공금 749원 53전을 건네받은 후 그 자리에서 면서기와 면장을 차례로 처단하였다. 태산면장을 처단한 후 형제는 군자금 1,000원을 백운한에게 제공하였고, 그는 모집한 군자금을 가지고 만주로 돌아갔다. 백주 대낮에 면장이 사살되는 사건이 발생하자, 일제 경찰은 곧바로 수사에 착수하였다. 이를 피하여 박규명·박만옥 등과 함께 중국 상하이로 망명하였다. 박인혁·엄승도 등 미처 피신하지 못한 동지들은 일제 경찰에 붙잡혔다. 이들은 1921년 3월 11일 평양지방법원 신의주지청에서 이른바 ‘정치에 관한 범죄 처벌의 건’ 위반 및 살인 등으로 사형 또는 징역을 받았다. 이 재판에서 중국으로 도피한 관계로 궐석재판(闕席裁判)을 받았는데, 검사는 사형을 구형하였고 판사는 무기징역을 선고하였다. 중국 상하이로 망명한 후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조계구역에서 인삼 장사를 하면서 생활한 것으로 확인된다. 1925년 6월 2일 상하이에서 임시정부의 제2대 대통령 박은식(朴殷植) 명의로 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 회의를 개최한다는 소집 통보가 내려졌다. 같은 해 6월 20일 프랑스조계에서 열린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박창길(朴昌吉)·최승봉(崔昇鳳)·나우(羅愚)와 함께 평안북도 출신 의원으로 추천되어, 이날 자격심사를 거친 후 승인되었다. 1928년 10월 국내의 관북(關北) 지역에 큰 수해가 발생하여, 상하이의 교민단(僑民團)·한인여자구락부(韓人女子俱)樂(部) 등 각 단체가 본국수해구제회(本國水害救濟會)를 조직하고 구제금을 모집할 때 그 기부자 명단에 포함되어 있었다. 이와 같이 중국 상하이에서 생활하였으나 중일전쟁 이후인 1938년 7월경 ‘퇴거명령(退去命令)’이 내려져 또다시 도피 생활을 시작하였다. 1920년에 함께 상하이로 피신했던 박규명은 이미 1931년 8월경 상하이 일본영사관 경찰에 붙잡혀 국내로 압송된 상태였다. 일제 경찰의 추적을 피하여 잠시 베트남 하노이로 망명했다고 전해진다. 같은 해 9월 초순 경 다시 상하이로 돌아오던 중 일본영사관 경찰에게 붙잡혀 평안북도경찰부로 압송되었다. 당시 주소지는 상하이 공동조계(共同租界) 해녕로(海寧路) 삼덕리(三德里)로 되어 있으며, 직업은 인삼상(人蔘商)이었다. 같은 해 12월 27일 평양복심법원에서 이른바 살인죄 및 ‘정치에 관한 범죄 처벌의 건’ 위반 등으로 징역 10년을 받았다. 1939년 1월 7일부터 형 집행이 개시되어 경성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옥고를 치르던 중 이른바 ‘1940년 은사(恩赦)’에 의해 징역 7년 6월로 감형되었다. 1943년 11월 3일 병보석으로 풀려났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변은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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