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웅세
朴雄世1897 ~ 미상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충열단
- · 맹호단
- · 철혈광복단
- · 고려공산당
포상 정보
- · 애국장(1995)
관련 사건
- · 충열단
- · 맹호단
- · 철혈광복단
- · 고려공산당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국장(1995) 1897년 함경북도 경원군(慶源郡)에서 출생하였다. 이명은 박건이다. 1910년을 전후한 시기에 부모를 따라 북간도로 이주한 것으로 추정된다. 북간도(北間島) 허룽현(和龍縣) 명동촌(明東村)에 설립된 민족학교인 명동중학교를 졸업하였다. 명동중학교 재학 중이던 1914년, 북간도에 소재한 중학교의 학생들과 철혈광복단(鐵血光復團)을 조직하였다. 명동중학교를 졸업하고 같은 북간도 왕칭현(汪淸縣)에 있는 대전학교(大甸學校, 또는 나자구무관학교(羅子溝武官學校))·동림학교(東林學校)에 입학하였다. 대전학교는 러시아 연해주에서 활동하던 이동휘(李東輝)가 북간도로 와 이종호(李鍾浩)의 기부금 1,000원으로 1914년 8월 설립한 무관학교였다. 초기 북간도지역 독립운동기지 개척자들인 김규면(金奎冕)·김립(金立)·김영학(金永學)·김광은(金光恩)·오영선(吳永善)·김하정(金河鼎) 등이 교관으로 임명돼 민족 및 무관 교육을 실시하였다. 그러나 대전학교는 설립된 지 2년 만인 1916년 폐교되었다. 항일과 군사교육을 시키는 이 학교를 주목해 감시하던 일본이 중국 정부에 압력을 가해 폐교시켰던 것이다. 학교가 문을 닫자 허룽현의 집으로 돌아와 명동학교 재학생과 졸업생, 교원들로 구성된 충열단(忠烈團)의 단장을 맡았다.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시작된 만세시위는 곧이어 해외 거주 한민족에게도 파급되었다. 북간도 거주 한인들도 3월 13일 용정촌(龍井村) 북쪽의 서전대야(瑞甸大野)에 모였다. 이날 모인 한인의 수는 3만여 명에 달하였다. 이들은 ‘조선독립축하회’라 명명한 독립선언식을 거행하고 만세시위를 진행하였다. 시위가 시작되자 300여 명의 충열단 단원들을 이끌고 선두에서 용정시내로 향하였다. 뒤를 이어 왕칭·옌지(延吉)·허룽·훈춘현(琿春縣) 등 북간도 전역에서 모인 한인들이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뒤를 따랐다. 일본의 강압에 못이긴 중국 측이 무차별 사격을 가해, 시위대 13명이 희생되고 30여 명이 총상을 입었다. 이 같은 희생에도 북간도 지역 한인들은 그 해 4월 말, 5월 초까지 만세세위를 이어갔다. 만세시위의 열기가 줄어들자 철혈광복단의 동지들인 임국정(林國禎)·한상호(韓相浩)·최봉설(崔鳳卨, 일명 최이붕(崔以鵬)·최계립(崔溪立) 등과 러시아 연해주로 갔다. 적극적인 독립운동을 위한 무기 구입을 목적으로, 각자 집의 소를 팔아 자금을 마련하였으나 성과는 얻지 못하고 돌아왔다. 연해주에서 돌아와 그 해 8월 초 최봉설·임국정·윤준희(尹俊熙) 등과 맹호단(猛虎團)이라는 독립운동 단체를 조직하였다. 일본의 밀정 노릇을 하는 친일파들을 처단하기 위함이었다. 맹호단을 조직한 8월 중, 친일 행위를 하던 안인종(安仁鐘)과 조덕진 두 사람을 체포하여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Владивосток)의 독립운동단체로 보내 그들의 처분을 맡겼다. 1919년 9월 최봉설이 철혈광복단 동지들을 불러 모았다. 연해주를 무대로 활동하던 김하석(金夏錫)이 북간도로 와 독립운동자금을 모집할 방안을 제시했다는 것이다. 조선은행 각 지점들이 서로 돈을 이동시키므로, 그 돈을 탈취하면 일시에 거금을 만들 수 있다는 안이었다. 모두 동의하여 거사를 준비하는 단계에서는 최봉설과 윤준희가 주도해 일을 추진하기로 하고, 한상호(韓相浩)·김준(金俊)·임국정 등과 함께 지원하기로 하였다. 돈이 이동하는 정확한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윤준희가 먼저 조선은행 용정촌지점 서기인 전홍섭(全洪燮)을 만났다. 전홍섭은 조선은행 직원이었지만, 그 시기 북간도 최대 독립운동 단체인 대한국민회(大韓國民會) 회원이었다. 전홍섭은 단원들의 거사에 흔쾌히 협조할 것을 약속하였다. 전홍섭은 그 해 12월까지 몇 차례 조선은행 지점 사이에 돈이 이동한 사실을 파악하다가 마침내 거사를 벌이기에 가장 손쉽다고 할 수 있는 기회를 포착하였다. 조선은행 용정촌 지점장인 이케다 고로(池田五郞)와 일본인 직원 다케다 지로(武田二郞)의 대화를 엿듣는 중, 다음 해 1월 4일 약14, 15만원의 현금이 회령지점에서 수송된다는 것을 알았다. 또 이 돈은 와룡동(臥龍洞)을 거쳐 왕칭으로 향한다는 행로까지 알게 되었다. 전홍섭은 이 사실을 거사를 주도하고 있는 최봉설에게 알렸다. 1920년 1월 3일 최봉설은 명동촌(明東村) 향교동(鄕校洞)에 있는 김계하(金桂河)의 집으로 단원들을 모은 뒤, 다음 날 수행할 거사의 작전 계획을 짰다. 각자의 임무를 논의하고, 권총은 시위용으로 휴대는 하되 현금수송자를 절대 살해하지 말 것이며, 그들을 포박하기 위한 포승줄을 준비할 것 등을 합의하였다. 다음 날인 1월 4일 오후, 6명의 대원은 각자 준비물을 소지하고 수송마차가 지나갈 길목인 동량(東良) 상리사(上里社)에 있는 동량어구(東良於口)에 모였다. 이때 윤준희·김준과 함께 한 조가 되었고, 최봉설·임국정·한상호가 한 조가 된 2개 조를 만들었다. 각 조가 사전 협의한 장소로 가 기다리고 있자, 오후 5시 반경 수송마차가 나타났다. 최봉설조가 수송차를 덮쳤고, 윤준희조가 합세하였다. 거사는 순식간에 끝나 현금은 확보했으나, 희생자를 내지 않기로 한 협의 사항은 지키지 못하였다. 수송을 호위하던 일본인 순사 나가토모(長友嘉相次)와 한국인 진길풍(陳吉豊)을 살해하고 말았다. 15만원이란 거금을 확보한 뒤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하였다. 단원들은 사정에 따라 서로 나뉘어 가게 되었다. 이때 북간도 지인의 집에 은신해 있다가 최봉설이 보낸 편지를 받고, 한 달 후까지 동지들이 있는 장소로 가기로 하였다. 확보한 자금을 러시아 화폐로 바꿔 엄인섭(嚴仁燮)의 주선을 받아 장총과 탄환, 속사포 및 폭탄 등을 구입하였다. 그러나 중간 역할을 한 엄인섭이 일본의 밀정이었다. 엄인섭은 1907~8년 안중근(安重根)과 함께 연해주에서 의병부대를 구성해 항일 투쟁한 인물이었으나, 이때는 변절해 일본의 앞잡이가 되어 있었다. 그의 밀고로 1920년 1월 31일 밤, 일본 경찰의 습격을 받았다. 최봉설은 필사의 노력으로 탈출했지만, 윤준희·한상호·임국정은 붙잡히고 말았다. 함흥지방법원 청진지청을 거쳐 1921년 2월 5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거사에 참여했던 단원 6명 전원 사형을 받았다. 체포된 윤준희·임국정·한상호는 형장에서 사망하였고, 나머지는 궐석재판에 의한 사형 판결을 받았다.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해 뒤늦게 동지들이 붙잡힌 것을 알게 되었다. 사형을 받았기에 가족이 있는 북간도로 돌아가 그곳에서 활동하기도 어려운 상황이 되었다. 연해주지역에 머무르며 한동안 정세를 살피다가 이르쿠츠파 고려공산당(高麗共産黨)에 가입하였다. 이르쿠츠파 고려공산당은 1920년 7월 전로고려공산당(全露高麗共産黨) 중앙중회를 결성하고 연해주와 만주를 무대로 세를 확장해 나갔다. 조선은행 회령지점의 자금을 탈취한 투쟁력이 인정되어 전로고려공산당 집행부의 간부에 선임되었다. 고려공산당의 간부가 되어 1923년 8월 하순 임호(林虎)·허기(許璣) 등 동지들과 북간도로 잠입하였다. 수사망이 곳곳에 포진해 있었지만, 위험을 무릅쓰고 옌지·왕칭 등에 거주하는 옛 동지들을 찾아다니며 지부 결성을 위해 활동하였다. 1931년 일본은 만주사변을 일으켜 만주를 점령하고, 이듬해 3월 1일 괴뢰국 ‘만주국’을 세웠다. 그리고 자신들의 무력을 중국과 연해주 깊숙한 지역까지 침투시키고 확장하였다. 이에 한국 독립운동자들이 그 지역을 무대로 활동하기가 어려워졌다. 그 같은 상황이 되자 헤이룽장성(黑龍江省) 랴오허현(饒河縣)의 한인 마을로 가 이주 한인들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한 자위단(自衛團)을 결성해 부단장으로 활동하다 해방을 맞았다. 1947년 5월 서울로 귀환하였다. 이후 서울에서 활동하며 한국군사후원회, 함경북도도민회 중앙위원 및 사무국장, 한국민족대표자대회 대의원 등으로 활동하였다. ⋮채영국⋮
국어사전
원문에서 어려운 낱말을 선택하거나 직접 검색해 보세요.
낱말을 검색하면 뜻풀이가 여기에 표시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