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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기수

閔箕秀

1884 ~ 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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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민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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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북 청진(淸津)3.1운동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함경북도 청진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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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애족장(2011)

관련 사건

  • · 신암동 만세시위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2011) 함경북도 청진부(淸津府) 신암동(新岩洞) 출신이다. 판결문에 따르면 1884년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1919년 당시 잡화상(雜貨商)이었다가 그 해 3월 일어난 청진부 신암동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함경북도 최대의 항구도시인 청진에서는 성진군(城津郡)과 더불어 빠른 시기인 1919년 3월 10일에 만세시위가 전개되었다. 이 날 만세시위는 조직화가 덜 된 군중들의 시위로 경찰에 의해 해산되었지만, 이후 청진의 만세시위를 촉발시켰다. 먼저 만세시위를 준비한 것은 신암동에서 음식점을 경영하던 윤병후(尹炳厚)였다. 그는 몇몇 동지들과 함께 3월 15일 청진부와 바로 인접한 경성군(鏡城郡) 용성면龍(城面) 수성동(輸城洞)에서 동시에 만세시위를 전개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이 계획은 경찰의 강화된 단속으로 인해 실행에 옮길 수 없었다. 한편 운송업에 종사하던 청진부 포항동(浦項洞)의 장채남(張彩男)은 3월 초 서울에 갔을 때 만세시위를 목격하였다. 그리고 3월 중순 열차로 귀향하던 도중 들린 원산(元山)에서도 만세시위를 목격하였다. 원산에서 독립선언서 1장을 입수하여 귀향하여 신암동에서 여인숙을 경영하던 서성칠(徐星七)과 해산물가게를 운영하던 윤학송(尹學松)과 만나서 서울과 지방에서 전개되고 있던 만세시위 상황을 서로 주고받았다. 그리고 청진에서도 3월 25일 만세시위를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또한 만세시위에서 배포할 독립선언서를 인쇄하기로 하였다. 이를 위해 서성칠과 윤학송은 청진부 인근인 부령군(富寧郡) 청암면(靑巖面) 직하동(稷下洞)에 있던 면사무소에서 등사 기구를 훔쳤다. 그리고 3월 23일 저녁 장채남은 청암면 자작동(自作洞)에 거주하다 청진부로 이사 온 장두량(張斗良)과 함께, 자작동에 있던 방낙선(方洛先)의 집에서 확보한 등사판으로 ‘조선민족독립단(朝鮮民族獨立團) 청진’ 명의의 조선독립선언서 1,000여 매를 인쇄하였다. 이 선언서는 독립선언서를 그대로 복사한 것이 아니라, 취지는 살리고 내용은 축약해서 작성한 것이었다. 또한 만세시위에 사용할 태극기 100개도 준비하였다. 3월 24일 새벽 장채남과 윤학송은 각각 청진부의 동부지역인 포항동과 신암동의 집집마다 조선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배포하였다. 또한 친일적 행동을 해온 지역 유지들에게는 태극기, 선언서와 함께 협박장을 동봉하여 발송하였다. 24일 오전부터 헌병들은 포항동과 신암동에 배포된 독립선언서와 태극기의 출처를 수소문하기 시작하였다. 주도자들은 잡히지 않았지만, 계획한 3월 25일 만세시위는 전개할 수 없었다. 3월 28일 윤병후의 집에 장채남·윤학송·서성칠·최재훈(崔在勳)·우석구(禹錫九) 등과 함께 회집하였다. 이날 모임에 참석해 동지들과 함께 3월 31일 신암동에서 다시 만세시위를 일으키기로 결의하였다. 만세시위에 사용할 대형 태극기는 최재훈이 제작하기로 하고, 우석구와 최재훈은 소형 태극기 100개를 준비하기로 하였다. 3월 31일 정오 신암동에 있던 윤학송의 집 앞에는 400여 명의 군중들이 모여들었다. 윤병후·윤학송 등과 함께 군중들에게 소형 태극기를 배부하고, 대형 태극기를 앞세우고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때 윤병후·장채남·윤학송·서성칠 등과 함께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1시간이 넘게 진행되던 만세시위는 경찰의 탄압으로 해산되었다. 이 과정에서 윤병후·장채남·윤학송·서성칠 등과 함께 경찰에 붙잡혔다. 1919년 4월 21일 함흥지방법원 청진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고 항소하였는데, 당시 사건을 담당한 검사도 항소를 신청하였다. 같은 해 5월 24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원판결이 취소되고 징역 1년 6월을 받았다. 다시 상고하였으나 그 해 6월 21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1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박종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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