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윤모
文允模1884 ~ 미상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2011)
관련 사건
- · 가좌면 만세시위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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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2011) 황해도 해주군(海州郡) 가좌면(茄佐面) 취야리(翠野里) 출신이다. 판결문에 따르면 1884년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1919년 4월 해주군 가좌면 만세시위에 참가하였다. 해주의 만세시위는 김명신(金明信)이 2월 28일 오후 해주로 와서 남본정(南本町)의 기독교 목사 오현경(吳玄卿)에게 독립선언서를 전달하면서 시작되었다. 해주 읍내에서는 3월 1일과 3월 10일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이후에는 해주군의 중부지역과 동부지역을 중심으로 9일 석동면(席洞面) 서원리(書院里), 10일 서변면(西邊面), 12일 추화면(秋花面) 약현리(藥峴里) 청단(靑丹) 장터, 17일 청룡면(靑龍面) 영양리(迎陽里) 등으로 만세시위가 확산되었다. 적극적으로 참여한 가좌면의 만세시위도 그 연속선상에 있었는데, 주로 천도교인과 기독교인이 연합하여 준비하였다. 거사일인 4월 3일 오후 2시 가좌면 취야리의 취야 장터로 나아갔다. 장터에는 만세시위에 뜻을 같이하는 600여 명의 군중이 모여 있었다. 만세시위가 시작되자 장터에 모인 군중과 함께 태극기를 앞세우고 독립만세를 외치면서 선두에서 시위를 이끌었다. 큰 거리를 행진하고 일제 식민통치의 상징인 면사무소와 순사주재소로 향하였다. 주재소에 이르러서는 만세를 부르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일부 청년들과 함께 주재소로 들어가 전화선을 끊고 기물을 부수는 물리력을 행사하였다. 이렇게 되자 시위대를 폭도로 규정한 일제 경찰은 진압을 빌미로 무자비한 발포를 시작하였다. 그러나 시위에 참여한 군중들도 쉽게 물러서지 않고 돌을 던지며 저항하였고, 그 과정에서 부상자가 속출하였다. 선두에서 시위대를 이끌었음에도 불구하고 다행히 일제 경찰의 총탄은 피할 수 있었지만, 대대적인 검거 작전의 체포망을 벗어나지는 못하였다. 만세시위 주도자로 50여 명의 사람들이 검거되었는데, 최봉조(崔鳳祚)·서장관(徐壯寬)·염준석(廉俊錫)·이용선(李龍善)·이진각(李鎭珏) 등과 함께 붙잡혔다. 일제 경찰의 모진 심문을 겪고 결국 보안법 위반으로 재판에 넘겨졌다. 일자 미상일에 1심에서 보안법 위반과 소요로 징역 2년 6월을 받고 항소하였으나, 1919년 9월 6일 평양복심법원에서 기각되었다. 다시 “반만년의 역사를 지닌 민족이 하루아침에 노역에 들어갔으니 어찌 앙천(仰天)의 아픔이 없겠는가? 조선 민족으로서 독립만세를 부른 것은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라고 주장하며 상고하였지만, 그 해 10월 25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1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박종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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