朴寧熙
朴熙1896. 12. 28 ~ 1930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신흥무관학교
- · 북로군정서
- · 대한독립군단
- · 신민부
포상 정보
- · 독립장(1977)
관련 사건
- · 신흥무관학교
- · 북로군정서
- · 대한독립군단
- · 신민부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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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장(1977) 1896년 12월 28일 충청남도 부여군(扶餘郡) 은산면(恩山面) 가곡리(佳谷里)에서 태어났다. 아호는 정헌(靜軒)·검추(劍秋)·금추(琴秋)이고, 이명은 박두희(朴斗熙)·박영섭(朴寧燮)·박초섭(朴草燮)이다. 서울의 휘문의숙(徽文義塾)을 나왔고, 지린성(吉林省) 퉁화현(通化縣) 허니허(哈泥河)의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 초등군사반에서 정식 군사교육을 받았다. 1919년 만세운동 이후 김좌진(金佐鎭)은 서로군정서측에 북로군정서의 단기 사관학교인 사관연성소(士官鍊成所)의 교관으로 신흥무관학교의 교관과 졸업생을 요청하였다. 이때 김춘식(金春植)·오상세(吳祥世)·백종렬(白鍾烈)·강화린(姜化麟)·최해(崔海)·이운강(李雲崗) 등과 함께 파견되었다. 1920년 3월 지린성 왕칭현(汪淸縣) 씨다오포(西大坡)의 사관연성소가 개교할 때부터 학도 단장으로 활동하면서 김좌진 사령관을 보좌하는 사령부 부관 임무도 겸임하였다. 독립군의 무장활동이 강화되자, 일제는 1920년 8월 이른바 「간도지역불령선인초토계획(間島地域不逞鮮人剿討計劃)」을 세우고, 9월에 마적을 사주하여 훈춘(琿春)에 있던 일본영사관을 공격하게 하였다(훈춘사건). 일제는 이를 빌미로 그 해 10월 일본군 2만여 명을 동원하여 서북간도의 독립군을 탄압하는 한편, 독립군의 인적·물적 기반인 한인 마을을 공격하고자 하였다. 이에 독립군은 일본군의 공격을 피해 백두산 일대의 안전한 지역으로 이동하기 시작하였다. 추격해 오는 일본군과 1920년 10월 21일부터 26일까지 지린성 허룽현(和龍縣) 싼다오거우(三道溝) 청산리(靑山里) 일대에서 큰 전투를 벌였다. 이 전투에서 북로군정서 사령부의 부관으로 직접 참전하여 승리를 이끌었다. 청산리대첩(靑山里大捷)에서 승리한 독립군은 역량을 보존하고 일본군의 추격을 따돌리기 위해 북만주로 이동하였다. 북만주로 이동하던 독립군은 1920년 12월 헤이룽장성(黑龍江省) 미샨현(密山縣)에 도착하여 서일(徐一)을 총재로 하는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을 결성하였다. 이때 제1여단의 참모로 선임되었다. 1921년 1월경 독립군은 러시아의 이만(伊滿, 달레네친스크, Dalnerechensk)으로 이동하였다. 이때 독립군 사이에서 볼셰비키혁명세력이 독립군을 후원할 수 있다는 입장과 원조할 조건이 안 된다는 두 입장으로 갈린 것이다. 김좌진 등과 함께 후자의 입장에서 러시아의 스보보드니(自由市)로 이동하지 않고 북만주로 돌아왔다. 1922년 8월 북만주에 흩어져 있던 독립군은 통합하여 대한독립군단을 결성하였다. 대한독립군단은 둥닝현(東寧縣)을 중심으로 쑤이펀허(綏芬河)에서 하얼빈(哈爾濱)을 잇는 중동철도를 따라 세력을 확장시켜 나갔다. 이 과정에서 현지의 한인 사회와 마찰이 일어났다. 이에 1922년 말 무링현(穆棱縣) 마치아오허(馬橋河)에서 지방 관헌에게 무장을 해제당하였다. 1924년 3월 동빈현(同賓縣)에서 북로군정서를 재건하려는 김규식(金奎植) 등의 주도로 대한독립군정서(大韓獨立軍政署) 결성되자 이에 동참하여 행정부장에 취임하였다. 1925년 3월 10일부터 닝안현(寧安縣)의 닝안현성 내에서 북만주 독립운동단체를 통합하기 위한 창립대회가 열렸을 때, 대한독립군단 대표 5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참석하였다. 창립대회에서는 “우리들은 민중의 요구에 응하여” 각 단체의 이름을 취소하고 신민부(新民府)를 조직하여 “국가의 건설과 민중의 철저한 해방을 도모하기 위하여 강권 폭력의 침략주의를 근본적으로 제거하고, 더욱 일보를 전진하여 우리들과 동일한 지위에 있는 세계 민중과 협동 동작을 취하겠다.”는 「선포문」을 발표하였다. 창립대회에서 김혁(金赫)을 중앙집행위원장에 선출하는 등 중앙집행위원회가 구성되었을 때, 중앙집행위원의 한 사람으로 선출되어 보안총지휘 겸 보안사령관을 맡았다. 신민부에서 군사 지도자를 양성하기 위해 성동사관학교(城東士官學校)를 세우자 교관으로도 활동하였다. 그런데 신민부는 군사 활동에 우선을 두려는 세력과 북만주 조선인의 생활안정을 위해 자치 활동에 우선을 두려는 세력 사이에 마찰이 계속되었다. 흔히 전자를 군정파, 후자를 민정파라 불렀다. 두 세력은 합의를 보지 못하고 1927년 12월 총회를 계기로 따로따로 신민부 집행부를 결성할 때, 김좌진이 이끄는 군정파에 가담하였다. 두 정파는 1928년 들어 민족유일당을 결성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났을 때, 그리고 같은 해 10월 빈주사건(賓洲事件, 의무금을 징수하려는 신민부 군정파 소속 보안대의 무력 행동에 반발하는 주민을 죽이거나 부상을 입히는 사건)이 일어났을 때 격렬하게 대립하였다. 1928년 민족유일당 결성운동이 좌절된 이후 만주지역의 민족운동 세력 내부에서는 좌우대결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1929년 사회주의운동 세력이 민족주의운동 세력을 개량주의로 공격하면서, 만주지역에서의 좌우대결은 살상을 일으킬 정도로 경직된 분위기로 바뀌어갔다. 1930년 1월 김좌진이 사회주의자에게 암살당하였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같은 해 암살당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신주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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