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달
朴在達1917. 8. 15 ~ 1963. 2. 19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결심대(決心隊)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결심대(決心隊)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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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1990) 1917년 8월 15일 경상북도 경산군(慶山郡) 남산면(南山面) 사월리(沙月里)에서 아버지 박만조(朴晩祚)와 어머니 손문순(孫文順)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함양(咸陽)이며, 농사를 짓고 있었다. 맏형은 당시 북해도(北海島)에 강제 연행되었고, 아우 박재천(朴在千)은 자인공립보통학교(慈仁公立普通學校)를 졸업하고 남산면 농업지도원을 거쳐 1942년부터 남산면 서기로 근무하고 있었다. 1937년 중일전쟁과 1941년 태평양전쟁으로 이어지는 전시체제하에서 경산군 남산면 청년들이 일제의 강제적인 징용·징병을 거부한 이른바 결심대(決心隊)의 ‘대왕산죽창의거(大王山竹槍義擧)’를 주도하였다. 1944년 6월 남산국민학교(南山國民學校)에서 징병·징용훈련을 받고 있던 남산면 일원의 청년들을 규합하여 일제에 항거하기 위한 논의를 시작하였다. 우선 남산면 사월리의 청년들에게 “일제에 충성하여 징용에 끌려가 죽을 바에야 어차피 죽을 목숨 일제에 항거하다 죽자”라고 제의하였다. 이러한 제의를 할 수 있었던 것은 동생 박재천과 같은 마을 김인봉(金仁鳳)이 각각 남산면 서기와 기수로 근무하고 있었으므로 상대적으로 시국의 변화와 일제의 정책에 대한 정보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1944년 7월 5일부터 7월 15일까지 모두 3차례에 걸친 회합을 통해 탈출 계획을 세우고 동지 규합에 나섰다. 7월 5일 마을의 참외밭 원두막에서 열린 1차 회합에서는 남산면 사월리의 청년 박재천·김인봉·성상룡(成相龍)·최동식(崔東植) 등과 함께 동지 규합 방법을 논의하였다. 7월 8일 2차 회합에서는 사월리 청년들을 비롯하여 산양리(山陽里)의 김임방(金任方), 송내리(松內里)의 김위도(金渭道), 남곡리(南谷里)의 최외문(崔外文) 등을 각 마을 대표로 정하고 동지를 규합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7월 15일 밤 9시경 원당보에서 열린 3차 회합에서는 각 마을에서 모인 청년 29명과 함께 주요 안건을 논의하였다. 그 중 26명이 대왕산으로 올라가 투쟁하기로 하고, 박재천·김인봉 등과 함께 마을에 남아 정보연락을 맡기로 하였다. 같은 해 7월 26일 새벽 4시 30분경 남산면 사월·산양·송내·남곡리의 청년 26명이 대왕산으로 올라갔다. 대왕산에 오른 청년들은 ‘결심대(決心隊)’를 조직하여 편제를 정한 뒤, 8월 13일 전원이 체포될 때까지 일본 경찰과 투쟁하였다. 이 투쟁 기간 중 정보연락대장으로 이들을 후원하였다. 뿐만 아니라 결심대가 3차례에 걸쳐 일본 경찰의 공격을 물리친 뒤, 주재소 공격과 주재소 주임 처단, 식량 공급과 진지 이동 등에 대한 새로운 계획을 세울 때 결심대의 헌병과 협조하여 논의하였다. 그러나 8월 9일 식량공급을 더 이상 기다리지 못한 결심대의 대원들은 하산하여 각기 마을에서 은신하였다. 8월 13일까지 결심대의 대원 모두가 체포될 때 함께 붙잡혔다. 결심대의 대원들과 함께 남산면사무소에서 이틀 동안 조사를 받고 경산경찰서로 이송되어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기소되었다. 1944년 10월 14일 대구형무소로 다시 이송되어 심한 고문을 받는 등 옥고를 치르다가 1945년 4월 병보석으로 출소하였고, 광복으로 8월 17일 소송이 취하되었다. 이후 면의원으로 활동하다가 1963년 2월 19일 사망하였다. 1995년 5월 31일 남산면 사월리에 ‘대왕산죽창의거공적비(大王山竹槍義擧功績碑)’가 건립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86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권대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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