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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사문

姜士文

1876 ~ 1909. 12.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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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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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장성(長城)의병

지도 위치

시·군·구 대표 지점

이 위치는 전라남도 장성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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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애국장(1998)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국장(1998) 1876년경 전라남도 장성군(長城郡) 외동면(外東面) 옥동(玉洞)에서 태어났다. 이명은 강판열(姜判烈), 종교는 기독교이다. 대장간업과 산포수를 하다가 1908년 1월 28일 김태원(金泰元, 일명 김준(金準)) 의병부대에 참여하여 항일전을 펼쳤다. 김태원 의병장은 김돈(金燉)의 권유로 1907년 11월 기삼연(奇參衍) 의병장이 장성 수연산(隨緣山)에서 결성한 호남창의회맹소(湖南倡義會盟所)에 합류하여 선봉장으로 활동하였다. 그러나 기삼연과 김태원은 여러 지역에서 동시에 의병이 일어나지 못하고 훈련되지 않은 의병들을 대부대로 운용하는 것이 무모하다고 판단, 의병부대를 나누어 분산 활동하기로 결정하였다. 이후 김태원 의병부대는 1908년 (음)2월 2일 설날 담양군(潭陽郡) 남면(南面)의 무동촌(茂洞村)에서 일본군 광주수비대를 요격하여 승리를 거두었다. 당시 일본 군경은 의병을 진압하기 위해 크고작은 진압 작전을 실시하였는데 요시다(吉田勝三郞) 수비대대의 한 부대가 무동촌에 접근하자 김태원 의병부대는 무동촌 돌담에 의지하여 일본군 수비대를 공격하였다. 이후 전남의 나주(羅州)·무안(茂安)·장성(長城)·함평(咸平) 등지에서 신출귀몰한 유격전을 전개하였다. 이처럼 항일 투쟁을 전개하던 김태원 의병부대에서 활동하다가 1908년 2월 14일 독립하여 자택으로 돌아가 군사와 총기 40정을 모았다. 이어 장성군 구산리(口山里)에 100여 명의 의병이 결합한 이모(李某) 부대와 합동하여 112명의 의병과 총기 80정을 얻어 의병부대를 편성하고 총대장(總大將)이 되었다. 그해 3월 3일부터 항일전을 펼친 의병부대는 주로 전남의 광주(光州)·담양(潭陽)·장성·창평(昌平)·화순(和順) 등에서 부일배(附日輩)를 응징하고 일본군과 교전하였다. 1909년 3월 14일 새벽 창평군 연천(蓮川)에서 일본군 광주순사대(光州巡査隊)의 맹렬한 공격을 받고 부하 5명, 총기 5정을 잃고 자신은 오른쪽 다리에 총상을 입어 일단 의병부대를 해산하였다. 총기 66정은 동군(同郡)의 땅에 묻어 숨기고 재거의를 모색하였다. 1909년 6월 8일 장성군 학림(鶴林)에 있었는데, 그해 7월 29일 장성군 외동면 옥동의 주막에서 광주헌병분견소의 일본군에게 체포되었으며, 1909년 12월 17일 광주감옥에서 교수형을 당해 순국하였다. 1909년 10월 27일 자 일본군 임시 한국파견대 사령부에 의하면, 활동지는 석실장[石實場 : 전남 곡성군 죽곡면 동계리]과 흥양(興陽)이었고, 부하는 100명이었다. 그의 의병 부대에 참여한 조문섭(趙文燮)은 1908년 (음)12월 9일 약 20명의 의병과 함께 화승총 13정을 지니고 전남 광주군 한치면(漢峙面) 원우리(遠隅里) 송모(宋某)에게서 쌀 25석을 군량미로 획득하였다. 나진삼(羅進三, 광주군 가마보면 복룡촌)·이광숙(李光淑, 광주군 신기리)·이기언(李基彦, 장성군 내동면 고산리)·황화중(黃花仲, 광주군 거정리)도 부하였는데 미상(米商)으로 가장하고 광주군의 큰 시장에 출입하며 의병 활동을 하였다. 서우범(徐禹凡)도 부하로 확인되는데 1909년 6월 장성군 갈동리(葛洞里)에 있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8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윤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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