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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진두

南鎭斗

1894. 2. 7 ~ 1919. 5.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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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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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영덕(盈德)3.1운동

지도 위치

시·군·구 대표 지점

이 위치는 경상북도 영덕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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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애국장(1991)

관련 사건

  • · 영덕군 영해면 만세시위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국장(1991) 1894년 2월 7일 경상북도 영덕군(盈德郡) 영해면(寧海面) 괴시동(槐市洞, 현 괴시리)에서 태어났다. 1919년 3월 영덕군 영해면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가 붙잡혀 영덕경찰서에 조사를 받던 중 고문으로 인해 사망하였다. 영덕 지역의 만세운동은 3월 18일 영해장터에서의 대규모 만세시위로 시작되어 4월 4일 남정면(南亭面)의 만세시위로 막을 내렸다. 만세시위가 일어난 곳은 영덕군 내 총 9개 면 중 6개 면, 영덕면(盈德面)·영해면·남정면(南亭面)·지품면(知品面)·병곡면(柄谷面)·창수면(蒼水面)이다. 그 중에서도 영덕 북부의 영해면·병곡면·창수면의 만세시위는 경상북도 내에서도 가장 격렬했던 곳이다. 3월 18일과 19일은 영덕 지역의 만세운동이 절정을 맞이한 시기이다. 영해면의 만세시위는 영덕군 지품면 낙평동(洛坪洞) 교회 조사(助事) 김세영(金世榮)에 의해 발의되어, 낙평동 교회 구세군 참위로 있던 권태원(權泰源)과 병곡면 송천동(松川洞) 교회 조사 정규하(丁奎河)가 시위 계획을 구체화하고 동지들을 규합하였다. 한편 영덕면의 만세시위는 김세영의 부탁으로 같은 교회 영수(領袖) 김혁동(金爀東)이 영덕면 금호동(錦湖洞) 교회 조사 강우근(姜佑根)을 찾아간 것이 계기가 되었다. 영덕읍 교회와 그 외 3개 교회를 감독하는 지위에 있던 강우근은 만세시위를 추진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고 영덕면의 시위는 지품면 시위로, 영해면의 시위는 병곡면 시위와 창수면 시위로 이어졌다. 대규모로 전개된 격렬한 만세시위로 영해면과 병곡면의 경찰관주재소와 그 밖의 관공서들이 크게 파손되었다. 일본 경찰은 시위대에게 구타를 당하거나 시위대를 피해 도망갔다. 영해면에 지원을 나왔던 영덕경찰서장의 경우 남효직(南孝直)·남여명(南汝明)·권상호(權相鎬)·김실광(金實光) 등에 의해 구타를 당한 끝에 일본인이 운영하는 여관에 끌려가 감금당하는 일까지 발생하였다. 그러나 3월 19일이 되자 시위대 진압을 위한 지원 병력들이 속속 도착하였다. 오전 10시경에는 포항의 헌병대에서 6명이, 오후 5시경에는 대구의 보병 80연대로부터 장교 이하 17명이 도착하였다. 일제 군경은 합세하여 시위대 진압에 나섰고, 시위대를 향해 실탄 사격을 감행하였다. 이로 인해 임창목(林昌穆)·최재곤(崔在崑)·이해술(李海述)·이회동(李會東) 등 8명이 사망하고, 남효량(南孝樑)·김위환(金渭煥)·김도식(金道植)·김위석(金渭錫) 등 16명이 부상을 입었다. 결국 시위대는 해산되었고 뒤이어 시위 주도자에 대한 일제 군경의 대대적인 검거가 이루어졌다. 이런 과정에서 일제 군경의 검거를 피해 제2차 만세시위를 계획하였으나, 1919년 4월 20일 영덕경찰서에 붙잡혔고 모진 고문 끝에 그 해 5월 10일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박준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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