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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원희

朴元熙

1898. 3. 10 ~ 1928. 1.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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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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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국내항일

지도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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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위치는 서울특별시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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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단체

  • · 경성여자청년회
  • · 중앙여자청년동맹
  • · 근우회
  • · 신간회

포상 정보

  • · 애족장(2000)

관련 사건

  • · 경성여자청년회
  • · 중앙여자청년동맹
  • · 근우회
  • · 신간회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2000) 1898년 3월 10일 서울 계동(桂洞, 현 서울 종로구 계동)에서 아버지 박래빈(朴來彬)과 어머니 충주 박씨 사이의 막내딸로 태어났다. 본관은 고령(高靈)으로 진사공파(進士公派)의 후손이다. 학창 시절에 박연희(朴延熙)라는 이름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출생지에 대해서는 충청남도 대전(大田)이라는 설도 있다. 사회주의자 김사국金(思國)과 혼인하여 1녀를 두었다. 양반 가문에서 태어나 어머니의 반대를 무릅쓰고 근대 교육을 수학하였다. 1909년 관립한성고등여학교(官立漢城高等女學校) 예과 입학 후 1911년 본과를 거쳐 1914년 졸업하였다. 1915년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京城女子高等普通學校) 사범과에 입학하여 1916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였다. 졸업 이후에는 철원공립보통학교(鐵原公立普通學校) 교원으로 근무하다 4년 만에 사직하였다. 1919년 만세운동에 참가하여 옥고를 치르고 풀려난 김사국과 1920년 7월 15일 결혼하였다. 1921년 10월 김사국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고학하며 영문학과 사회과학을 공부하였다. 오빠 박광희(朴廣熙)와 남편 김사국의 사상적 영향과 이때 경험한 노동자 생활을 바탕으로 가난한 노동자의 삶과 열악한 여성의 처우에 대해 각성하여, 사회주의와 여성해방사상에 관한 책들을 탐독하였다. 1923년 일본에서 귀국한 뒤, 민족운동과 각종 사회운동의 일선에서 활약하였다. 1923년 국내 청년단체가 서울 YMCA회관에 집결하여 개최한 전조선청년당대회(全朝鮮靑年黨大會)에서 부인 문제를 논하여 가정제도 개혁, 자유로운 결혼과 이혼 등의 의제를 통과시켰다. 한편, 남편 김사국은 공산주의 활동을 하다가 ‘신생활 필화 사건’으로 수배되어 부부가 함께 1923년 4월 무렵 만주로 피신하였다. 옌지현(延吉縣) 용정촌(龍井村)에 정착하여 동양학원(東洋學院)에 영어 교사로 취직하였다. 이와 동시에 일제 공관에 대한 폭탄을 투척하고 관리 처단, 사회주의 선전물 배포 등을 계획한 동양학원의 설립자 방한민(方漢旻)과 뜻을 같이하여, 학원 내 사회주의 선전부와 특별부에 소속되었다. 이후 1923년 8월 12일과 13일 천도경편철로(天圖輕便鐵路) 개통식에 조선총독이 참가할 때를 노려 총독을 암살하고 위의 계획들을 실행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동양학원 학생들을 감시하던 일제 경찰은 1923년 7월 학생들에게서 압수한 공산주의 인쇄물들을 바탕으로 동양학교 교원과 학생들을 붙잡았다. 이때 방한민·김사국 등과 함께 계획의 주도자로 지목되어 붙잡혀 재판에 회부되었다. 1923년 9월 29일 재간도일본총영사관에서 열린 예심에서 증거불충분에 따른 기소유예로 풀려났다. 이후 서울로 돌아와 사회주의 계열 청년·여성단체에 소속되어 사회문제와 민족문제를 다루었으며, 정파·노선 간 통합 단체 설립에 힘을 쏟았다. 서울청년회와 무산자동맹회 등 단체를 통해 노동자의 교육문제를 설파하였다. 1924년 5월 사회주의적 여성운동의 추진을 목표로 조선여성동우회(朝鮮女性同友會) 설립을 주도하였다. 1925년에는 경성여자청년회(京城女子靑年會)의 설립을 주도하고 집행위원에 선임되었다. 1926년 11월에 여성해방이 무산계급의 계급적 승리에 일조할 것이라고 인식하여 사회주의 여성단체들을 통합한 중앙여자청년동맹(中央女子靑年同盟)을 결성하고 임시의장에 선출되었다. 1926년부터 제기된 좌우합작노선의 필요성에도 공감하여, 1927년 신간회(新幹會)의 자매조직이자 여성 최대의 조직인 근우회(槿友會) 창립준비위원으로 참가하였다. 근우회가 발기할 때 유각경(兪珏卿)·황신덕(黃信德) 등과 함께 회원 모집을 담당하였고, 교양부 집행위원으로서 당시의 부인문제와 식민지 체제하 한국인 여성의 사명에 대해 강연하여 여성의 정치참여를 강조하였다. 그리고 선전물 제작·보급에도 관여하였다. 1927년 11월 신간회본부 대회준비위원회의 의안작성부(議案作成部) 부원과 신간회 경성지회의 간부로서 활동하며 민족협동전선의 당면 사업을 논의하였다. 이처럼 신간회와 근우회의 관련 사무를 추진하던 와중에 지병으로 인해 1928년 1월 5일 사망하였다. 1월 10일 사회단체 연합장으로 장례식이 거행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조범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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