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원식
朴源植1893. 8. 6 ~ 1955. 10.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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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애족장(1995)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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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1995) 1893년 8월 6일 충청남도 홍성군(洪城郡) 결성면(結城面) 성곡리(城谷里)에서 박영환(朴永煥)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려서 한문을 익혔으며, 고향의 사립 덕명학교(德明學校)를 졸업한 뒤 1907~1908년 무렵 서울로 올라와 휘문의숙(徽文義塾)을 다녔다.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학교를 중퇴하고 낙향한 뒤 조치원청년회 회장 등을 맡았다. 1919년 만세운동이 일어나자 고향에서 만세운동에 참가하였다. 만세운동 직후 서울로 올라와 이신애(李信愛)·정규식(鄭奎植) 등과 만나 그들의 권유로 조선민족대동단(朝鮮民族大同團, 이하 대동단)에 가입하였다. 만세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되던 1919년 3월 말 전협(全協)·최익환(崔益煥) 등이 조직한 대동단은 항일 역량을 결집하기 위해 사회 각층의 인사들을 망라한 범민족적 단체를 구상해 갔다. 이와 함께 상하이(上海)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내 조직인 연통부 역할을 담당하면서 임시정부 선전활동을 활발하게 펴나갔다. 대동단은 1919년 5월 조직의 일부가 발각되면서 일본 경찰의 경계망이 좁혀오자 본부를 중국 상하이로 옮기고, 같은 해 10월 의친왕(義親王)의 상하이 망명을 추진하는 한편 민족운동의 분위기를 고조시키기 위해 제2의 만세운동을 계획해 나갔다. 이때의 만세운동은 서울에서 활동하던 대한독립애국단(大韓獨立愛國團)과 대한민국청년외교단(大韓民國靑年外交團) 등의 비밀단체들과 연대를 이루어 추진한 것이었다. 제2의 만세운동 계획에 이신애·나창헌(羅昌憲)·안교일(安敎一) 등과 함께 격문 인쇄와 배포의 책임을 맡으며 계획에 동참하였다. 그러나 거사 당일 사전 약속이 차질을 빚으면서 거행하지 못하게 되자, 이신애·정규식 등과 함께 당초 계획대로 만세시위를 일으키기로 뜻을 모으고 11월 28일 안국동(安國洞) 광장에서 사전에 준비한 태극기와 ‘조선독립 만세’라고 쓴 깃발을 흔들면서 만세운동을 거행하였다. 이때 현장에서 붙잡혀 1921년 3월 23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이른바 ‘정치에 관한 범죄 처벌의 건’, 출판법, 보안법 위반 등으로 징역 1년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풀려난 후 1923년 조선일보 홍성지국장을 지내며 농민들을 대상으로 문맹퇴치운동을 벌이는 한편 홍성지역 학생들의 항일의식 고취에도 힘을 쏟았다. 1925년 광천노동조합(廣川勞動組合)과 광천청년회·광천소년회 등이 조직될 때 배후에서 지원 역할을 아끼지 않았다. 1929년 11월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나자 홍성에서도 1930년 홍성공업전수학교 학생들이 시위를 계획했는데, 일제 경찰에 사전 발각되면서 10여 명의 학생이 붙잡히고 말았다. 이때 일제 경찰의 불법적 직권남용을 지적, 항의하다가 이른바 경찰범처벌규칙 위반이라는 이유로 구류 25일을 받았다. 이후 1927년 신간회(新幹會)가 성립될 때 홍성지회 설립에 앞장서 지회장을 맡았으며, 1930년 11월 신간회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임되어 사회운동을 벌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장석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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