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 독립운동가 목록으로

박영순

朴榮淳

1916. 7. 12 ~ 1947. 4. 2

김판서 캐릭터 이미지

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박영순

김판서는 역사 탐구를 돕는 가상의 AI 문화해설사예요.

추천 질문을 누르거나, 궁금한 내용을 직접 물어보세요.

0/200자
제주(濟州)국내항일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제주도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지도에서 보기 →

관련 단체

  • · 교육강연회

포상 정보

  • · 건국포장(1995)

관련 사건

  • · 교육강연회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건국포장(1995) 1916년 7월 12일 전라남도 제주도 애월면(涯月面) 하귀리(下貴里)에서 태어났다. 1924년 무렵부터 2년간 한학을 수학하고, 1926년 8월 일본 오사카(大阪)로 건너가 오사카 남구 긴오우소학교(金甌小學校) 야학부에 입학하여 수학하였다. 1932년 3월 긴오우소학교를 졸업한 후 고향 선배 강문일(姜文一)과 함께 인근에 소재한 전기제작공장에서 일하였다. 공장에서 직공으로 일하던 중 같은 고향 출신 김귀영(金貴榮)과 교류하면서 일제의 폭압적인 식민 지배에서 벗어나고자 사상적으로 공산주의를 받아들였다. 1934년 1월 귀국하여 8월 중순 자신의 집에 모여 강문일 등 제주 고향 지인들과 야학회를 개설하고 지역 아동들에게 국어·산수 등을 가르쳤다. 9월 강문일·강경생(康庚生)·강창선(姜昌善) 등과 만나 “조선의 교육제도는 1면 1교주의이나 제주도는 면적이 넓어 학교와 거리가 멀고, 월사금도 비싸 무산 아동은 입학이 불가능하므로 우리들이 이 무산 아동을 모아 교양하여 문맹을 타파하고 동시에 계급의식을 고취하여 장래 투사로 양성해야 한다”라고 제창하면서 문맹 타파와 동시에 일제와의 투쟁을 선언하였다. 이후 30여 명의 학생을 모집하여 1934년 10월 초순 저녁 7시부터 김용범(金容範)의 집에서 야학회를 시작하였다. 갑·을·병 3개 반을 나누어 2시간씩 각 학과를 가르쳤고 학생 수가 증가하여 야학 장소를 11월 초 보다 넓은 애월읍 하귀리 2구 강상언(姜尙彦)의 집으로 옮겼다. 1934년 12월 애월읍 하귀리 장규현(張奎賢)의 집에서 별도로 야학을 운영하던 김홍규(金弘奎)·김을봉(金乙鳳) 등과 만나 자신들의 운영 취지와 뜻이 같아 공동전선결성 협의회를 개최하여 야학을 통합하여 교육강연회를 조직하였다. 하귀리 1구와 2구의 야학 학생을 통합하여 약 80여 명의 대규모 야학으로 확대한 후 1935년 2월 상순 김예태(金禮太)의 집으로 이전하여 야학 활동을 지속하였다. 이 과정에서 일본제국주의의 침략 때문에 점차 빈곤이 심해지고 자본주의의 횡포로 한민족이 착취당함을 학생들에게 역설하면서 일제와의 투쟁을 강조하였다. 학생들에게 이러한 항일의식을 고취시키기 위해 이천만가(二千萬歌)·혁명가(革命歌)·단결가(團結歌) 등의 노래를 가르치고 함께 부르며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 이러한 활동이 일제 경찰에 탐지되어 1935년 5월 강문일·배두봉(裵斗鳳)·김을봉·김홍규 등과 함께 붙잡혀 4개월여 간 조사를 받았다. 당시 신문은 이 사건을 ‘제주도 적색사건’ 또는 ‘제주 소년소녀 적화건’ 등으로 기사를 내면서 대형 사건으로 취급하였다. 1935년 8월 13일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에 송치된 후 8월 23일 기소, 구속되었다. 같은 해 10월 10일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고 항소하였다. 1936년 6월 25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 집행유예 4년을 받고 풀려났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박경목⋮

국어사전

국어사전

원문에서 어려운 낱말을 선택하거나 직접 검색해 보세요.

낱말을 검색하면 뜻풀이가 여기에 표시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