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재봉
閔載鳳1890. 12. 8 ~ 1940. 5. 25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서산군 대호지면 만세시위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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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1990) 1890년 12월 8일 충청남도 서산군(瑞山郡) 대호지면(大湖芝面, 현 당진시) 송전리(松田里)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여흥(驪興)이다. 만세운동 이전부터 천도교(天道敎)에 입문하여 활동하면서 항일사상을 가지고 있었고, 대호지면사무소(大湖芝面事務所)의 토목계 서기로 근무하였다. 대호지면 독립만세운동은 남주원(南柱元) 등 도호의숙(桃湖義塾) 출신의 유생들을 중심으로 시작되었다. 남주원 등의 유생들은 3월 3일의 고종황제(高宗皇帝) 인산(因山)에 참례하기 위해 서울로 올라와 만세운동에 참여한 뒤 귀향하여 만세운동을 추진하였다. 대호지면에서는 면장 이인정(李寅正)을 비롯하여 면서기 김동운(金東云)·강태완(姜泰玩), 면사무소 직원 송재만(宋在萬)등과 함께 만세시위를 계획하고 주도하였다. 이들은 인근 지역에서 일어난 만세운동 소식을 접한 뒤 대호지면에서도 만세시위를 일으키기로 결의하였다. 거사일은 천의장터 장날인 1919년 4월 4일로 정하고, 사전에 면내의 각 리(里) 별로 연락망을 구성하였다. 다수의 주민들을 만세시위에 참여시키기 위한 방안으로 「도로수선병목정리(道路修繕並木整理)의 건」이라는 공문을 각 마을에 보내 도로 보수를 위하여 한 집에 한 명씩 4월 4일 면사무소로 모이라는 내용을 전달하였다. 또한 4월 3일 각 마을의 구장과 이장에게 이 공문서를 직접 교부하면서 내용을 설명하였다. 그날 밤 면사무소에서 강태원·김동운 등과 함께 면사무소의 등사판을 이용해 독립선언서와 한운석(韓雲錫)이 작성한 「애국가(愛國歌)」를 각각 300매씩 인쇄하고, 태극기를 제작하는 등 사전 준비를 진행하였다. 거사일인 4월 4일 아침 면사무소로 앞에 집결한 600여 명의 주민들에게 면장 이인정·남주원 등과 함께 주민들을 모이게 한 실제 목적은 만세운동이라고 설명하고 동참할 것을 독려하였다. 대부분의 주민이 이에 찬성하고 만세운동에 동참하자, 이인정의 지휘에 따라 만세시위 대열을 갖추어 조선독립만세를 연달아 외치면서 7km 떨어진 천의장터를 향해 행진하였다. 시위대열이 천의장터에 도착하자 시장에 나온 사람들이 만세운동을 목격하고 속속 동참했는데, 시위대의 규모는 1,000여 명에 이르렀다. 이들과 함께 장터의 곳곳을 행진하며 만세시위를 펼쳤다. 만세시위가 마무리될 무렵 천의장터로 급파된 당진경찰서 순사들의 발포로 4명의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이에 분노하여 군중들과 함께 천의주재소로 달려갔다. 송재만·남상은 등의 지휘에 따라 주재소를 완전히 파괴한 후, 제2차 거사를 기약하고 해산하였다. 이날 밤 송전리의 자택에서 동지들과 회의를 열고, 4월 8일을 만세운동의 재거사일로 결정하였다. 하지만 이 계획은 홍성헌병수비대가 대호지면에 출동하여 만세시위 참여자에 대한 대대적인 색출과 검거 활동을 전개함에 따라 좌절되었다. 이때 만세시위를 주도했던 대부분의 인사들이 일제 헌병에게 붙잡혔다. 이때 체포를 면하였으나, 이른바 보안법과 ‘정치에 관한 범죄 처벌의 건’ 위반, 소요를 이유로 수배되었다. 그 해 6월까지도 붙잡히지 않아 6월 30일 기소중지로 불기소되었으나, 1920년 여름 일제 경찰에 붙잡혔다. 1920년 8월 27일 공주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출판법 위반과 공문서 위조·행사 등을 이유로 징역 1년 6월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항소하였으나, 그 해 10월 22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일제 경찰의 조사 과정에서 혹독한 고문을 당했고 출옥 후에도 그 후유증으로 고통 받았다고 한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애족장(1980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도면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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