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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민

文載敏

1903. 7. 14 ~ 1925.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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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문재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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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해 해주(海州)3.1운동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황해도 해주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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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애족장(1998)

관련 사건

  • · 해주군 해주읍 만세시위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1998) 1903년 7월 14일 황해도 해주군(海州郡) 송림면(松林面) 수압리(垂鴨里)에서 태어났다. 이명은 문향희(文香姬)이다. 1919년 당시 황해도 해주군(海州郡) 해주면(海州面) 중리(中里)에 거주하였고, 기생이었다. 해주 지역의 만세시위는 1919년 2월 28일 오후 해주 읍내 남본정(南本町)의 기독교 목사 오현경(吳玄卿)을 찾아 온 김명신(金明信)이 「독립선언서」 300장을 전달하면서 준비되기 시작하였다. 김명신은 민족대표 33인의 일원인 박희도(朴熙道)로부터 해주와 옹진(甕津)지역의 기독교계에 독립선언서 전달을 부탁받았다. 오현경은 김창현(金昌鉉)·황학소(黃鶴巢)·최명현(崔明鉉) 등과 3월 1일 남본정 예배당에서 고종(高宗)에 대한 봉도식(奉悼式)을 거행하고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후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180여 명의 기독교인들과 함께 만세삼창을 외쳤던 이 날의 만세시위가 해주지역에서의 첫 만세시위였다. 해주 지역의 기독교인들은 3월 9일 오후 2시를 기해 읍내 남욱정(南旭町) 장터에서 다시 만세시위를 계획하였으나, 하루 전에 만세시위 계획이 누설되면서 실패하였다. 반면 해주 지역의 천도교인들은 3월 10일에 만세시위를 성공적으로 전개하여 읍내에 모여들어 호응한 기독교인과 불교인들까지 합해 3,000여 명 규모의 만세시위를 이어나갔다. 이즈음부터 해주군의 중부지역과 동부지역을 중심으로 만세시위가 확산되었다. 3월 9일 석동면(席洞面)과 서원리(書院里), 3월 10일 서변면(西邊面), 12일 추화면(秋花面) 약현리(藥峴里) 청단(靑丹) 장터, 3월 17일 청룡면(靑龍面) 영양리(迎陽里) 등에서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해주 읍내에서는 3월 29일부터 4월 1일까지 만세시위가 지속되었다. 4월 1일 만세시위는 오후 2시경 해주 읍내 종로(鐘路)에서 시작되었다. 이 날 시위는 기생조합(妓生組合)의 구성원들이 주축이 되었다. 이 때 조합장인 문월선(文月仙)을 비롯하여 김해중월(金海中月)·이벽도(李碧桃)·김월희(金月姬) 등과 함께 손가락을 깨물어 흐르는 피로 만든 태극기를 들고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종로에서 남문으로 행진하는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호응하면서 시위대는 규모가 3,000여 명으로 늘어났다. 시위대는 동문을 거쳐 다시 종로로 복귀하여 조선 독립에 대해 연설하고, 격려문을 낭독하였다. 일제 헌병과 경찰은 다시 서문으로 향하던 시위 군중을 강제적으로 해산했는데, 이 때 다른 기생들과 함께 구속되었다. 1919년 6월 26일 해주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4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개성의 호수돈여자고등보통학교(好壽敦女子高等普通學校) 기예과(技藝科)를 졸업하였고, 이화학당(梨花學堂)으로 유학하였다. 이후 구체적인 행적은 확인되지 않으며, 1925년 12월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8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박종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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