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무현
文武鉉1899. 4. 17 ~ 1970. 12. 22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혈성단(血誠團)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부천군 용유면 만세시위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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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1990) 1899년 4월 17일 경기도 부천군 용유면(龍游面) 남북리(南北里)에서 태어났다. 이명으로 문무년(文武年)을 사용하였다. 1919년 3월 경기도 부천군 용유면 관청리(官廳里)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1919년 3월 23~24일경 조명원(趙明元)의 제안으로 조종서(趙鍾瑞)·최봉학(崔奉學) 등과 함께 독립운동에 관한 논의를 진행하였다. 이들은 조명원의 집에 모여 운동 방법에 대해 협의한 끝에 비밀결사로 혈성단(血誠團)을 조직하고 3월 28일에 거사를 일으키기로 결정하였다. 무명천을 사들여 대형 태극기를 만들고 대형 태극기에 ‘혈성단 주모자 조명원·조종서·문무현·최명교(崔明敎)’라고 크게 썼다. 조명원이 문안을 기초하고 4명이 글씨로 ‘조선독립운동을 거사할 것이니 28일 관청리 광장에 모이라’는 취지를 기재한 격문 80여 통과 신서(信書) 1통을 작성하였다. 이를 봉투에 넣어 4명이 분담하여 용유면의 남북리·거잠리(巨蠶里)·을왕리(乙旺里)·덕교리(德橋里) 면민들 중 문자를 해독할 수 있는 주민들에게 배부하였다. 3월 28일 용유면 관청리 광장으로 가서 미리 만들어 둔 태극기를 앞세우고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이에 150여 명의 사람들이 함께 독립만세를 연호하였고, 사전에 논의가 되었던 이난의(李蘭儀)도 한 무리의 시위대를 이끌고 관청리 광장으로 와서 합세하며 조선독립만세를 소리 높여 외쳤다. 일제의 기록에 따르면 28일 용유면 시위에 250명이 참가하였고, 9명을 시위현장에서 체포했다고 한다. 이날 부천 군내 십여 지역에서 각 5, 60명의 시위대가 횃불을 놓고 독립만세를 외쳐 인천경찰서에서 순사를 급파해 해산시켰다. 이후 관청리 만세시위를 주도했다는 이유로 동지들과 함께 붙잡혔다. 1919년 5월 22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을 받고 불복하여 항소하였다. 같은 해 7월 19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원판결이 취소되고 징역 1년으로 감형되었다. 이에 다시 “우리들의 행위는 조선 민족으로서 정의 인도에 기초하는 의사 발동이고 범죄가 아니다”라고 무죄를 주장하며 상고하였으나, 그 해 9월 27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최우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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