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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재

金賢宰

1917. 10. 20 ~ 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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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김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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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인도네시아방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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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단체

  • · 고려독립청년당

포상 정보

  • · 건국포장(2011)

관련 사건

  • · 암바라와 의거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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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포장(2011) 1917년 10월 20일 경성부 연지동(蓮池洞)에서 태어났다. 일제가 창씨개명을 강요하자, 신석현재(神石賢宰)로 고쳤다. 태평양전쟁 때 군속으로 근무하면서 인도네시아에서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일본군에 맞서다 붙잡혀 고초를 겪었다.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 발발 이후 일본군은 마닐라·싱가포르·자바·바탕반도·필리핀·버마 등을 차례로 점령하였다. 그 과정에서 일본군의 포로가 된 261,000명의 연합국 병사들은 동남아 각지에 설치된 포로수용소에 수용되었다. 일본 육군성은 연합국 포로를 감시하기 위해 1941년 12월 포로정보국을 설치하고, 한국과 대만의 청년들을 포로감시를 위한 군속(軍屬)으로 모집해 활용하기로 하였다. 1942년 6월 15일부터 8월 15일까지 3,016명의 청년들이 이를 위한 군사훈련을 받고, 포로감시원 ‘용인(傭人)’의 자격으로 8월 19일 화물선을 개조해 만든 수송선 10여 척에 나누어 타고 남방으로 이동하였다. 그 가운데 세 척의 수송선에 탄 1,408명의 청년들이 9월 14일 인도네시아 서부 자바의 딴중 쁘리옥(Tanjung Priok) 항구에 도착하였다. 이곳에는 1942년 7월 일본 육군성의 ‘포로수용소 설치’에 관한 군령에 따라 8월 15일 부로 제16군사령부 예하에 연합국 포로를 관리할 ‘자바포로수용소(爪哇浮虜收容所)’가 편성되어 있었다. 여기서 군속 신분으로 2년 동안 계약되어 근무하다가 1944년 6월 임기가 만료될 예정이었다. 하지만 일본군은 한인 군속들에게 근무 연장을 강요하였다. 이에 한인 군속들의 불만은 매우 높아져 갔다. 1944년 4월 태국 쳉마이 포로수용소 분견소 소속 포로감시원인 김주석(金周奭)의 탈출사건이 발생하면서 일본군의 탄압이 가중되었다. 이를 계기로 일본군은 자바에 있던 한인 포로감시원 모두를 3개 기수로 나누고, 각 기수별로 300여 명씩 ‘군속 재교육’을 실시하기로 하였다. 1944년 11월 25일부터 12월 24일까지 약 한달간 예정된 1차 재교육은 인도네시아 중부자바 세마랑(semarang)주 수모워노(Sumowono) 훈련소에서 실시되었다. 수모워노 임시교육대에서 재훈련을 받던 중 취사장 뒤편에서 모임을 갖고, 일본군에 대항할 조직을 결성하기로 뜻을 모았다. 교육대에 도착한 이후 한인 군속들과 개별 만남을 시도한 이활(李活)과 임헌근(林獻僅)의 협조를 받으며 문학선(文學先)(자카르타지구)·이상문(李相汶)(세마랑지구)·손양섭·조규홍(孫亮燮)·(曺圭鴻)(암바라와지구) 등과 매일 접촉하였다. 그리고 이활·임헌근과 함께 조직명, 조직체계, 인원구성 등을 연구하였다. 1944년 12월 29일 밤 11시 동지들에게 연락 하여 10여 명을 취사장으로 모이게 한 후, 이활의 개회로 시작한 회의에 참석하였다. 이때 당명·강령·선언문을 낭독하고 원안 채택을 제의하자, 만장일치로 가결되었다. 다음으로 미리 준비한 흰 천에 이활이 ‘고려독립청년당 혈맹동지’라고 쓰자, 9명의 동지들과 함께 서명하였다. 당의 강령·선언문·당가 등은 총령으로 추대된 이활이 작성하였다. 이때 당가의 작곡을 맡았다. 그리고 총령 아래 군사·조직부장(임헌근)을 두고 다른 책임부서는 지구 책임자를 두기로 하고, 임헌근이 조직부장을 맡았고, 이때 군사부장을 맡았다. 1945년 1월 4일부로 한인 군속과 포로들에 대한 말레이방면 전속명령이 내려지면서 1월 5일 이활 등과 수송선 탈취 계획을 논의하였지만, 1월 4일 전출 명령에 따라 세마랑 분소로 이동하게 되어 있던 손양섭·민영학(閔泳學)·노병한(盧秉漢)이 ‘암바라와 의거’를 일으켰다. 1월 7일 의거를 주도한 3명의 자결 소식이 전해지자, 동지 5명과 함께 다시 수송선을 탈취하기로 계획하였다. 이 거사의 총 지휘자로 딴중 쁘리옥 항에 정박중인 포로수송선 스미레환을 탈취하기로 하였지만, 배가 출발하고 중간에 계획이 새어나가 중지되었다. 1945년 1월 조직의 실체가 노출되고, 1월 28일 자카르타에서 이활, 세마랑 지구에서 조규홍과 이상문이 붙잡혔다. 2월 14일 병기조달 책임자인 박승욱(朴承郁), 연락과 통신 책임자인 지주성(池周成)과 3월 1일 말레이로 전속된 혈맹당원 6명도 붙잡혔다. 혈맹당이었던 이활·임헌근·이상문·조규홍·문학선·백문기·박창원·오은석과 기본당원인 지주성 등과 함께 10명은 1945년 5월 24일 제16군의 군법회의에 기소되었고, 7월 21일과 24일 군법회의재판을 받았다. 이 재판에서 10명 모두에게 이른바 치안유지법 제1조 위반죄가 적용되었고, 이때 징역 8년 6월을 받았다. 옥고를 치르다 일제가 무조건 항복을 선언한 이후 1945년 9월 4일 풀려났고, 1945년 10월 경 국내로 돌아왔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1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조성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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