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 독립운동가 목록으로

독립운동인명사전 - 한국독립운동정보시스템

1887. 11. 16 ~ 1938. 7. 13

김판서 캐릭터 이미지

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독립운동인명사전 - 한국독립운동정보시스템

김판서는 역사 탐구를 돕는 가상의 AI 문화해설사예요.

추천 질문을 누르거나, 궁금한 내용을 직접 물어보세요.

0/200자
경기 고양(高陽)중국방면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경기도 고양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지도에서 보기 →

관련 단체

  • · 대한민국 임시정부
  • · 의열단

포상 정보

  • · 독립장(2005)

관련 사건

  • · 사기 공산당 사건
  • · 김상옥 사건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독립장(2005) 1887년 11월 16일 경기도 고양군(高陽郡)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안동(安東)이며, 호는 제관(霽觀)이다. 이명으로 김자홍(金子弘)·김상엽(金相燁)을 사용하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초기에 참여하였으며, 국내에서 사상 단체 활동을 하였다. 대한제국 시절 통신원 주사, 탁지부(度支部) 주사, 세무주사로 근무하다가 1905년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東京) 호세이대학(法政大學) 정치경제학과에서 수학하였으며, 경술국치 이후 1912년 만주로 망명하였다. 이후 상하이(上海)·톈진(天津)·펑톈(奉天) 등지에서 항일운동에 참여하였다. 1919년 4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된 후 여기에 참여해 본격적인 독립운동에 나섰다. 임시정부가 일제의 침략 사실을 국제 사회에 알리기 위해 1919년 7월 7일 임시사료편찬회를 설치하고 책자 발간을 준비하였을 때, 김병조(金秉祚) 등과 함께 3개월 동안 사료편찬위원으로 활동했으며 그 결과로 『한일관계사료집』이 간행되었다. 그 해 12월 임시정부 법무부 비서국장에 임명되었으며, 임시정부가 평화 회의와 국제연맹이 조직되는 국제 정세를 고려하여 우리나라 자체의 적십자회를 만들고자 결성한 대한적십자회의 상임의원을 지냈다. 귀국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1920년 중반부터 국내에서 청년회 활동을 통해 동지 규합에 나섰다. 1920년 6월 28일 서울에서 전국의 각 청년회연합 통일 모임으로 발족된 조선청년회연합회 기성회 사교부원으로 선출되었고, 1921년 1월 서울청년회 결성에 참여하였다. 서울청년회는 3개 그룹의 연합으로 성립된 제한적인 민족통일전선체였다. 첫 번째는 이득년(李得秊)과 오상근(吳祥根)으로 대표되는 민족주의자 그룹, 두 번째는 장덕수(張德秀)·김명식(金明植)·윤자영(尹滋英)으로 대표되는 사회혁명당 그룹, 세 번째는 김사국(金思國)·한신교(韓愼敎)·이영(李英)으로 대표되는 사회주의자 그룹으로 나눌 수 있다. 이때 사회주의자 그룹에 속하였지만 서울청년회 주류인 김사국 그룹과는 일정한 거리가 있었다. 1922년 1월에는 좀 더 조직적이고 지속적인 운동을 펼치기 위해 사회주의 사상단체 무산자동지회 결성에 참여하여 상무위원으로 선출되었다. 무산자동지회는 “노동자의 단결, 상호부조, 잡지·서적의 간행, 강연·강습·연극, 각 방면의 조사연구 등” 5가지 사업을 추진하기로 당면 목표를 설정하였다. 1922년 초에 ‘김윤식사회장 반대운동’을 주도하였다. 대한제국 시기 ‘유림의 영수’로 추앙받던 김윤식(金允植)이 병사하자 『동아일보』는 이를 크게 보도하는 한편 장문의 사설로 그의 죽음을 애도하였다. 이때 ‘김윤식사회장 반대집회’를 조직하고 강연회 개최, 전단 발행, 신문·잡지를 통한 여론형성 등의 방법으로 반대운동을 전개하였다. 1922년 3월 사상단체 무산자동맹회 결성을 주도하고 4월 조선청년회연합회 제3차 정기총회에서 ‘사기공산당 사건’ 관련자를 제명할 것을 요구하였다. ‘사기공산당 사건’은 상해파 고려공산당이 러시아의 레닌 정부로부터 받은 거액의 운동 자금을 남용했다는 것이었다. 이 사건으로 무산자동맹회와 서울청년회 인사들은 사기공산당사건과 관계된 사회혁명당 인사들과 정면으로 대립하게 되었다. 이때 무산자동맹회 회장으로 서울청년회의 김사국, 조선노동공제회의 신백우(申伯雨) 등과 연합하여 사회혁명당 성토 대열에 앞장섰다. 1922년 4월 1일부터 열린 청년 단체 연합회에서 김사국과 함께 사기공산당 사건 관련자에 대해 제명을 요구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서울청년회에서 탈퇴하였다. 같은 해 6월 조선공산당 중립당 지도부에 참여하였다. 1923년 의열단사건에 연루되어 일제 경찰에 붙잡혀 고초를 겪었다. 1922년 여름, 의열단 단장 김원봉(金元鳳)은 단원 최용덕(崔用德)과 양건호(梁健浩)에게 국내 청년 단체 유력자와 접촉하여 국내 교통상황과 폭탄 수송방법을 조사하라고 지시하였다. 이때 중국에서 의열단원을 만나 만주까지의 폭탄 수송을 김원봉이 담당한다면, 만주에서 국내로 들여오는 것은 자신이 맡기로 하였다. 그 뒤 국내 청년단체 대표로 남정각(南廷珏)(이명 남영득)을 상하이에 파견하여 김원봉으로부터 폭탄 반입 방법에 대해 교섭케 하는 등 의열단의 항일운동을 돕도록 지시했는데, 거사 계획이 뜻대로 추진되지 않았다. 결국 1923년 1월 12일에 일어난 김상옥(金相玉)의 종로경찰서 투탄 의거에 연루되어 그 해 1월 28일 일제 경찰에 붙잡혔다. 김상옥 사건으로 징역 5년을 받고 옥고를 치르다가 1927년 4월 24일 도쿄(東京) 도요타마감옥(豊多磨監獄)에서 만기 출옥하였다. 풀려난 후에도 일제 경찰의 감시 대상이 되어 가택수색을 당하거나, 긴급 체포되기도 하였다. 1928년 8월 조선공산당 재건을 위한 비밀결사인 조선공산당재조직준비위원회를 설립하였고, 이듬해 1929년 6월에는 신간회(新幹會) 중앙집행위원을 지냈다. 이어서 비밀결사 ‘콤무니스트’ 그룹에 참여하여 조선공산당 재건 활동을 하였다. 국제선 그룹에서 옥중에 수감된 운동가와 그 가족을 돌보는 구호 사업인 모플МОПР 사업을 전담하였다. 운동 자금을 받아 수감자 차입비, 출옥자 치료비, 피검자 가족 구호비 등으로 사용하였다. 1930년 2월, 비밀결사의 존재가 드러나면서 관련자들이 붙잡히자 같은 해 4월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하였다.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한 이후 태평양노동조합 비서부에 근무하면서 국내의 적색노동조합운동을 후원하고 독려하는 일을 맡았다. 1932년 모스크바로 간 이후 소련 내무인민위원부 경찰에 붙잡혀 일제의 밀정이라는 혐의가 씌워져 사형당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5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차현지⋮

국어사전

국어사전

원문에서 어려운 낱말을 선택하거나 직접 검색해 보세요.

낱말을 검색하면 뜻풀이가 여기에 표시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