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순
金衡珣1886. 5. 4 ~ 1977. 1. 25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대한인국민회
포상 정보
- · 애국장(2011)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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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장(2011) 1886년 5월 4일 경상남도 통영(統營)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김해(金海)이다. 아버지는 개화파의 일원으로 1884년 갑신정변(甲申政變) 이후 통영으로 피신하여 있던 중 선생을 얻었다고 알려져 있다. 영문명으로 Harry S. Kim 또는 Heyung Soon Kim 등을 사용하였다. 1891년 이모 이(李)에스더가 살고 있는 인천으로 갔다. 인천에서 미국인 선교사 존스(趙元時, George Heber Jones) 목사로부터 서양 학문과 영어를 배운 후 세례를 받았다. 존스 목사의 도움을 받아 미국인 선교사 아펜젤러(Henry Gerhard Appenzeller)를 만나 전액 장학생의 신분으로 배재학당(培材學堂)에서 수학한 후 1901년 졸업하였다. 졸업 후 1년간 대한제국 인천세관 직원으로 근무하였다. 1902년 인천세관에 근무하던 중 유민원(綬民院)의 영어 통역관 모집에 응모하여 합격하였다. 유민원은 1902년 11월 16일 대한제국 정부의 국외 여행 목적 심사와 여행권 발급 등의 업무를 위해 궁내부(宮內府) 산하기구로 설치되었다. 유민원에서 한인들의 하와이 이민을 추진할 때,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 한인노동자들의 통역관 겸 인솔책임자로 임명받아 최초의 하와이 이민선에 탑승하였다. 1902년 12월 22일 인천 제물포항에서 미국 상선 갤릭호(S. S. Garilc)에 탑승해 1903년 1월 13일 하와이 호놀룰루에 도착하였다. 도착 후 한인들과 함께 하와이 마우이(Maui) 섬의 사탕수수 농장에 배치되어 통역의 업무를 담당하였다. 당시 통역 업무는 농장주와 한인 노동자 사이의 중재뿐만 아니라, 양자 간의 오해를 풀어주고 한인들의 복지를 증진시키는 역할도 맡았다. 약 6년 동안 마우이 섬의 사탕수수 농장 지배인 볼드윈(Baldwin) 밑에서 통역 일을 담당하며 한인 노동자들의 권익을 대변하였다. 1909년 통역을 사임하고, 귀국 후 존스 목사의 중매로 이화학당(梨花學堂) 성악과 출신인 한덕세(韓德世)((金德世), Daisy)와 결혼하였다. 1911년 홀로 중국 상하이(上海)로 건너가 미국인이 설립한 달러선박회사(The Dollar Shipping Company)에 입사해 근무하였다. 1913년 8월 상하이에서 화물선을 타고 다시 미국 샌프란시스코로 이주하였다. 샌프란시스코에 거주하던 중 1914년 2월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 샌프란시스코 지방회(桑港地方會)에 가입하고, 대한인국민회 사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하였다. 동시에 학업을 수학하기 위해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로스앤젤레스 고등학교(Los Angeles High School)를 다녔다. 이 시기에 부인 한덕세와 자녀들이 합류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1916년 봄 로스앤젤레스에서 북쪽으로 210마일 떨어진 중부 캘리포니아 지역에 위치한 리들리(Reedly)로 이주하였다. 부인 한덕세와 함께 리들리 묘목장(Reedley Nursery)과 묘목회사를 설립하고 사업에 전념하는 한편, 국민의무금을 꾸준히 납부하며 대한인국민회 활동도 이어 나갔다. 당시 프레즈노(Fresno)에서 원예·과일 육종전문가로 활동하던 앤더슨(Fred Anderson)과 교류하며 친분을 쌓고, 그가 개발한 넥타린(Nectarine) 복숭아(일명 털 없는 복숭아)의 특허품 묘목전매권을 획득하여 신종 18종의 넥타린 복숭아를 미국 전역에 보급하였다. 1921년 경 사업이 확장되면서, 부인 한덕세가 이화학당에서 수학할 당시 영어와 수학을 가르친 스승 김호(金乎)에게 리들리에서 함께 동업할 것을 권유하였다. 이에 한덕세, 김호와 함께 ‘김형제상회(Kim Brothers Company)’를 설립하고 사장에 취임하였다. 김형제상회는 주택 정원조경과 과수원을 위한 묘목회사, 과수원, 과일 포장Packing(팩킹), 운송 등을 주요 사업으로 하였다. 1921년부터 시장 판매용 채소사업을 시작하여, 500에이커에 달하는 농지를 경작하였다. 이후 복숭아 외에도 다른 과일들을 생산할 만큼 사업이 확장되었고, 통조림 제조와 대규모 온실시설 운영, 도매상으로까지 성장하면서 연간 매출액이 40만 달러에 달하였다. 1945년 이전까지 김형제상회의 재산은 리들리·프레즈노·다뉴바(Dinuba) 등 6개 지역에 산재한 500여 에이커의 농장과 40만 달러의 포장시설, 10만 달러의 묘목장 등 150만 달러 가량의 부동산과 700만 달러 가량의 동산을 소유한 것으로 평가되었다. 매년 순수입은 100만 달러를 넘어 독립운동 자금과 동포들의 기관 운영에서 최대 자금조달처의 기능을 수행하였다. 뛰어난 사업수완으로 부를 축적한 뒤, 수입의 상당 부분을 독립운동과 동포 사업을 위해 기부하였다. 특히 1936년부터 모금을 시작하여 1938년 로스앤젤레스에 건립한 대한인국민회 총회관 건립 당시 건축기금 3만 달러 중 김호와 함께 각각 1만 달러를 기부하였다. 1922년 대한인국민회가 중앙총회를 폐지하고 북미대한인국민회로 바뀌면서 활동이 매우 부진해졌지만, 중부 캘리포니아 지역에서 한인 사회를 위해 대한인국민회 활동을 이어나갔다. 대한인국민회 다뉴바지방회 실업부원으로 활동하고 있던 중, 1922년 1월 다뉴바지방회 재무로 선출되어 지방회 활동을 이어나갔다. 1929년 말 국내에서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나면서 미주 지역의 각 독립운동 단체들의 통일운동이 추진되자, 김호와 함께 미주 지역 통일운동에 기폭제 역할을 담당하였다. 1930년 3월 8일 중부 캘리포니아 지역에서 광주학생운동을 후원하기 위해 다뉴바·리들리·팔리어(Parlier) 지역에 거주하는 한인 40여 명이 다뉴바의 교회에서 ‘중가주한인공동회’를 발기할 때 참여하였다. 중가주한인공동회는 “독립운동에 관한 모든 일을 중가주 지방에 거주하는 대한인과 협동하여 진행하기로 함”이라 하여, 국내 학생운동에 대한 후원뿐만 아니라 모든 분야의 독립운동에 관여하는 항구적인 단체로 나갈 것임을 밝혔다. 이때 중가주한인공동회 회장으로 선임되었다. 1930년 5월 22일 장인환(張仁煥)이 샌프란시스코에서 사망하자, 북미대한인국민회는 각 지방회와 함께 사회장으로 장례를 치를 것을 결정하였다. 이때 리들리 지역 대표로 집행위원회에 참여하여 사회장을 집행하였다. 1931년 2월 21일 부인 한덕세와 함께 어머니를 방문하기 위해 6개월 예정으로 귀국길에 올랐다. 그러나 일본에서부터 일제 경찰의 감시를 느끼고, 3주일 만에 미국으로 다시 돌아오게 되었다. 1931년 9월 일제가 만주사변을 일으키자, 중가주한인공동회는 1931년 10월 17일 중국 상하이의 ‘상해한교전체대회(上海韓僑全體大會)’와 행동 일치를 꾀하기로 하고, 3개조의 결의안을 통과시키면서 ‘재미한교연합(在美韓僑聯合)’을 제의하였다. 1931년 11월 2일 중가주한인공동회는 북미대한인국민회 총회장 백일규(白一圭)와 회의를 갖고 만주사태를 당하여 재미한인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활동하기로 방침을 정하였다. 그러나 1930년부터 1935년까지 북미대한인국민회의 활동이 지지부진하자, 김호와 함께 미주 한인사회의 새로운 지도자로 부상하였다. 김호는 민주적이고 좌우합작의 중도연합적인 다수지도체제에 의한 ‘중앙집행위원제’를 제안하여 지지를 얻게 되었다. 두 사람의 노력으로 1936년 미주 한인단체들을 북미대한인국민회로 통일하였다. 1936년 5월 17일 북미 지역 민족운동가 22명의 대표자들을 리들리의 자택으로 초청해 원탁회의를 가졌다. 해당 회의에 참석한 대표자들은 북미 지역의 각 단체들이 대한인국민회 재건이라는 대전제 하에 하나로 연합하여 독립과 동포 권익 옹호운동을 전개해 나갈 것을 결의하였다. 1936년 5월 31일 김호, 이살음(李薩音)의 주도로 대한인국민회 중가주지방회가 다시 설치되었다. 1937년 1월 5일 헌장을 개정한 북미대한인국민회가 샌프란시스코의 총회관에서 개최한 제1차 대표대회에 참석하였다. 해당 대회 이후 김호와 함께 재정적 기반을 바탕으로 새로운 지도력을 발휘하며 1950년까지 송헌주(宋憲澍), 한시대(韓始大), 김용성(金容成) 등과 함께 북미대한인국민회를 이끌어 나갔다. 1940년대에 들어서도 김호와 함께 독립운동을 적극적으로 이어나갔다. 하와이 대한인국민회와 동지회(同志會), 북미대한인국민회의 연합이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하였다. 이에 미주 지역 9개 단체가 참가한 가운데 1941년 4월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개최된 ‘해외한족대회’에 참여하였다. 해당 대회에서는 미주 한인사회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기치 하에 완전히 통일되고 통할할 최대 연합기관인 ‘재미한족연합위원회(在美韓族聯合委員會)’를 설립하기로 결의하였다. 그 결과 1941년 4월 재미한족연합위원회가 설립되고 김호가 집행위원장으로 선임되었을 때, 재정위원장을 맡았다. 해방 이후인 1950년 1월 2일 북미대한인국민회 중앙집행위원장으로 선임된 이래 1960년까지 10년간 대한인국민회 집행위원장을 역임하며 한인사회에 봉사하였다. 1950년 6·25전쟁으로 조국이 폐허가 되자, 경기도 평택군(平澤郡) 진위면(振威面) 하북리(下北里)에 토지 7,000평을 구입해 ‘꽃동산 애육원’을 설립하고 전쟁고아들을 돌보았다. 1957년 5월 리들리에서 김호, 김원용(金元容) 등 미주 한인 실업가들과 협의하여 ‘한인재단(Korean Foundation)’을 설립하기로 하였다. 한인재단의 설립 목적은 ‘국내와 미국에 있는 한족의 고등교육과 과학적 지식을 증진하며 민주주의 이상을 발달’시키는데 두었다. 이와 함께 1962년 2월 1일 김호, 김원용, 송철 등 미주 한인사회의 재력가들과 협의하여 ‘캘리포니아 한인센터 설립위원회’를 발족하고, ‘로스앤젤레스에 한인회관(Korean Center)’ 설립을 추진하고 건물 구입비의 절반을 기부하기도 하였다. 1962년 9월에는 김호 등과 함께 한국 정부의 초청을 받아 방문하였고, 방문 당시 자신이 설립한 ‘꽃동산 애육원’의 운영 상황을 살펴보고 미국으로 돌아갔다. 1977년 1월 25일 91세로 사망하자 장례는 대한인국민회장으로 치러졌고, 리들리 공동묘지(Reedley Cemetery)에 안장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오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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