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원
金泰元1863. 9. 15 ~ 1933. 3. 13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이천수창의소
- · 서상렬 의병부대
- · 이강년 의병부대
포상 정보
- · 독립장(1993)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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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장(1993) 1863년 9월 15일 서울에서 성균관 진사 김집성(金鏶成)과 재령이씨(載寧李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해풍(海豊)이며, 자는 춘백(春伯), 호는 집의당(集義堂)이다. ‘집의’라는 당호는 유인석(柳麟錫)에게 받은 것이다. 시기를 특정할 수는 없지만, 무반 요직이었던 별군직(別軍職)과 선전관청 선전관(宣傳官)을 지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1895년 단발령이 내려지자, 김하락(金河洛)·조성학(趙性學)·구연영(具然英)·신용희(申龍熙) 등과 함께 이천(利川)에서 의병을 일으키기로 결의하고, 1895년 12월 31일 서울을 떠나 1896년 1월 1일 이천에 도착하였다. 구연영의 세거지로 알려진 이천에는 방춘식(方春植)이 화포군 도영장(火砲軍) (都領將)을 맡고 있었다. 김하락은 방춘식과 함께 관군 포군(砲軍) 명단을 놓고 먼저 100여 명을 선발하였다. 그리고 포군을 여러 대로 나누고, 이를 근간으로 삼아 의병을 모집하고자 하였다. 이후 김하락은 이현(梨峴)에 머물면서 구연영을 양근(揚根)·지평(砥平)으로, 조성학을 광주(廣州)로, 신용희를 음죽(陰竹)으로 파견해 추가로 의병을 모집하도록 하였는데, 이때 의병을 모집하기 위해 안성(安城)으로 파견되었다. 그 결과 조성학은 광주산성(廣州山城)에 들어가 별패진(別牌陣) 군관 김순삼(金順三)과 함께 별패진의 포군 300여 명을, 구연영은 양근·지평에서 군사 300여 명을, 신용희는 음죽·죽산(竹山)에서 화포군 300여 명을 모집하였다. 그리고 의포군(義砲軍) 100여 명도 자진해서 의병부대에 참여하기 위해 이천으로 모여들었다. 한편 안성으로 들어간 후, 이미 그곳에서 의병을 일으킨 민승천(閔承天)과 연합하였다. 이처럼 900여 명의 병력이 모아지고 이천에서의 의병 봉기 소식이 인근 지역에 퍼지자 인근 주민들도 참여를 희망하며, ‘이천수창의소(利川首倡義所)’라는 대규모 의병부대가 세워지게 되었다. 의병부대의 창의대장(倡義大將)에는 민승천이 추대되었고, 김하락은 각군 도지휘(都指揮)를 책임졌고 이때 선봉장을 맡았다. 조성학은 도총(都摠), 김귀성(金貴星)은 좌군장, 신용희는 우군장. 구연영은 중군장, 박준영(朴準英)은 후군장, 전귀석(全貴錫)은 소모관(召募官), 김경성(金敬誠)은 유격장, 심종만(沈鍾萬)은 돌격장으로 임명되었다. 의병부대는 1기(騎)를 3대(隊)로 하여 모두 3기 9대의 방식으로 편성되었고, 대마다 십장(什長) 및 초장(哨長)을 두었다. 1896년 1월 17일 의병부대는 일본군 수비대 보병 100여 명이 급파되어 이천으로 온다는 소식을 듣고, 복병계(伏兵計)를 쓰기로 하였다. 구연영·김귀성·신용희 등과 함께 각각 1초(哨)의 병력을 지휘하며, 백현(魄峴)(널고개)을 중심으로 매복하고 일본군을 기다렸다. 1월 18일 백현에 도착한 일본군에게 유인 작전을 통한 매복전을 전개해 승리하였고, 패전해 도망가는 적을 광주의 장항(獐項)(노루목)까지 추격해 많은 무기와 군량 등을 획득하였다. 하지만 2월 12일 의병부대는 이현(梨峴)에서 일본군 수비대 200명의 공격을 받아 패배하였고, 주요 인물들이 사방으로 흩어지면서 이천수창의소도 해체되었다. 2월 14일 김하락은 재결집을 위해 2월 5일 여주에서 거의해 의병부대를 이끌고 있던 심상희(沈相禧)에게 연합해 항전할 것을 제안해 500명의 병력을 지원받아 돌아왔다. 한달 뒤 2월 25일 구연영·신용희·전귀석·민승천 등과 함께 남아있는 의병들을 수습해 광주의 이현으로 합류하였다. 이때 모인 병력이 2,000여 명이 되자 새롭게 이천수창의소를 세우고, 대장에 박주영(朴周英), 여주대장에 심상희, 군사(軍師) 겸 도지휘에 김하락, 도소모(都召募)에 전귀석, 중군장에 구연영, 좌익장에 김귀성, 우익장에 김경성, 후군장에 신용희 등을 임명하였다. 이때 다시 선봉장 임무를 맡게 되었다. 한편 당시 광주 일대에서 활약하던 심진원(沈鎭元) 의병부대는 2월 23일 남한산성을 장악했지만, 서울에서 참령(參領) 장기렴(張基濂)이 이끄는 관군 800명의 공격으로 어려움에 처해 있었다. 당시 상황을 『집의당유고』에 ‘광주의장(廣州義將) 심진원이 병사 수가 적어 적에게 함락될 우려가 있다고 하며 하루에 세 차례나 알려왔다고 기록하였다. 결국 심진원의 요청을 받은 이천수창의소는 2월 28일 관군의 포위망을 뚫고 남한산성으로 들어가 광주의병부대와 합류하였다. 남한산성에 모인 의병부대는 광주·이천·양근·여주 등지에서 모인 연합부대의 형태가 되었고, 병력도 1,600여 명에 달하였다. 지휘부는 수성을 위해 산성의 주요 지역마다 군사를 나누어 배치하였다. 선봉장으로 남문을 맡았고, 후군장인 신용희를 북문, 우익장인 김경성을 서남문, 좌익장인 김귀성을 동문, 중군장인 구연영을 의병부대의 본진이 있는 중앙부를 각각 지키게 하였다. 군사적 요충지였던 남한산성이 연합의병부대에게 점령되자, 일제는 조선 정부를 압박해 강화도에 주둔하고 있던 관군 정예 병사 300명을 증파하도록 하였다. 관군과의 산발적인 전투가 계속되었고 다양한 공격을 잘 막아내던 의병부대는 시간이 흐르자, 다수의 의병들이 표방했던 서울 진공을 목표로 설정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관군은 김귀성을 통해 의병대장인 박주영을 매수하였다. 4월 2일 광주유수와 수원유수를 각각 제수받기로 한 박주영과 김귀성이 밤에 회식연을 베풀고, 다음날 새벽 서문과 북문을 관군에게 열어주었다. 4월 3일 의병들은 동서가 구분되지 않는 삼경부터 날이 밝기까지 격렬하게 싸우며 관군에게 저항하였지만, 500여 명의 병사와 군마가 죽는 피해를 입고 패전하였다. 이후 400여 명의 남은 의병과 함께 관군의 포위망을 뚫고 동쪽으로 탈출하였다. 남한산성에서의 패배 이후 구연영·신용희 등과 함께 김하락을 다시 의병장으로 추대하고 영남지방으로 이동하였다. 이때 제천에서 만난 유인석(柳麟錫)의 문인이 되었다. 1896년 6월 그는 선발대로 북상하다가 서상렬(徐相烈) 의병부대와 함께 낭천(狼川)(현 화천)에서 적과 만나 접전하였지만 패배하였다. 1898년 7월 유인석이 압록강을 건너 서간도 화이런현(懷仁縣)으로 이동하자, 겨울에 뒤따라 들어갔다. 유인석에게 『대학』과 『맹자』 등을 배우고 다시 귀국하였다. 이후 양평군 지평에서 유인석의 화서학파 동문인 금계(錦溪) 이근원(李根元)에게 수학하였다. 1905년에는 다시 거의한 원용팔(元容八) 의병부대와 함께 활동하였다. 하지만 원용팔이 원주의 궁곡에서 체포된 뒤 서울로 이송되어 평리원에서 재판을 받자, 그를 방문해 위로하기도 하였다. 한편 최익현(崔益鉉)은 을사늑약 이후 토적소(討賊疏)를 올리고 8도 사민들에게 국권회복 참여를 촉구하는 포고문을 보내며, 노성(魯城) 궐리사(闕里祠)에서 강회를 통해 유림들의 참여를 촉구하였다. 또한 1906년에는 선비들에게 진위(振威)향교에 모여서 서울 궐문 앞에서의 상소투쟁을 제안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 모든 시도가 실패로 돌아가자 판서 이용원(李容元)·김학진(金鶴鎭), 관찰사 이도재(李道宰), 참판 이성렬(李聖烈)·이남규(李南珪), 유학자 곽종석(郭鍾錫)·전우(田愚) 등에게 함께 국난 극복에 참여하자고 연락하였으나 모두 응하지 않았다. 그래서 최익현은 문하생 최제학(崔濟學)을 통해 낙안군수를 지낸 임병찬(林炳瓚)과 연락해서 전라도에서 거의하기로 하였다. 이때 유인석의 명을 받고, 제천 의병부대의 주장이던 이정규(李正奎)와 함께 충남 정산(定山)으로 내려가 최익현 의병부대에 참여하였다. 6월 4일 의병부대를 따라 순창까지 진격하였지만 체포되었고, 이 일로 3개월간 옥고를 치른 뒤 풀려났다. 1907년 1월 1일 최익현이 쓰시마(對馬島)에서 유명을 달리하고 유해가 고국으로 돌아오자, 분상(奔喪)하였다. 또한 춘천 가정리(柯亭里)에서 화서학파의 춘추대의적 역사정신을 결집한 『송원화동사합편강목(宋元華東史合編綱目)』의 간행에도 참여하였다. 1907년 7월 광무황제 강제퇴위와 대한제국 군대 해산으로 다시 의병을 일으켰고, 홍천(洪川) 등지에서 활동하며 의병활동을 지속하였다. 하지만 세력이 크지 않아 이강년(李康秊) 의병부대에 합류하였다. 1908년 6월 이강년이 붙잡혀 교수형으로 사망할 때까지 항전을 계속한 것으로 보인다. 1915년 1월 29일 유인석이 중국 콴뎬현(寬甸縣) 방취구(芳翠溝)에서 사망하자, 직접 문상하였다. 유고문을 모아 필사본으로 제작한 『집의당유고(集義堂遺稿)』가 전해진다. 또한 1933년 이규현(李奎顯)이 지은 「행장(行狀)」과 1954년 유인석의 아들인 유제함(柳濟咸)이 지은 「묘표(墓表)」도 남겨져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조성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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