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顯國
顯國1905. 9. 1 ~ 1946. 8. 19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문예운동사
- · 자유연합사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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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1990) 1905년 9월 1일 경기도 안성군(安城郡) 읍내면(邑內面)에서 김동환(金東桓)과 최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이후 경기도 이천군(利川郡) 청미면(淸渼面) 노탑리(老塔里)로 이주하였다. 본관은 김해(金海)이고, 이명은 김남해(金南海)이다. 1925년 조선일보 청안지국 기자를 지내면서, 그 해 4월 15일부터 17일까지 서울에서 개최된 전조선기자대회에 참가하였다. 1928년 충북 충주군(忠州郡) 노은면(老隱面) 연하리(連下里)에 기거하면서 무정부주의를 수용하였다. 1929년 2월 18일 충북 청주(淸州)에서 무정부주의를 표방한 항일비밀결사 ‘문예운동사’가 결성되자, 2월 23일 안병규(安秉奎)의 권유로 자택에서 가입하였다. “인류는 절대자유 또는 평등하다는 인류평등 원칙에 입각하여 현대의 국가조직이 이 사실에 위배되므로 이를 타파해야 한다”는 신념에서 일본 군국주의와 식민지 통치에 반대하였다. 잡지 『문예운동』 간행 등의 활동 중 1929년 5월 30일 일제 경찰에 붙잡혔다. 1930년 3월 12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미결구류 60일 통산)을 받았다. 그 해 5월 26일 경성복심법원에서 형이 확정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겪었다. 한편 1932년 4월 28일 충남 온양경찰서에서 예산의 성진호(成瑨鎬)를 비롯하여 서울·평양·당진 등지의 아나키스트 수십 명을 단속할 때, 자유연합사 주간으로 활동하던 중 붙잡혀 5개월 간 구금되었다가 9월 말로 풀려났다. 선전용 잡지 『자유연합』을 발간하였으나, 7월 22일과 10월 22일자 제1권 제2호와 제3호가 출판 금지되었다. 1935년 초에는 중국 텐진(天津)으로 망명하여 덕원후(德源厚)를 경영하였고, 동지 채은국(蔡殷國)과 비밀연락차 상하이(上海)로 가던 중 붙잡혀 6개월 간 구금되었다. 1940년 한중항일연합군 조직을 추진하던 유림(柳林)에게 군자금 10만원을 제공하였다. 광복 후 귀국하여, 1946년 7월 독립노농당(獨立勞農黨) 재정부장 대리를 지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80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조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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