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羅月煥

月煥

1911. 2. 14 ~ 1942. 3.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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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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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나주(羅州)광복군

지도 위치

시·군·구 대표 지점

이 위치는 전라남도 나주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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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단체

  • · 남화한인청년연맹
  • · 한국청년전지공작대
  • · 한국광복군

포상 정보

  • · 독립장(1963)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독립장(1963) 1911년 2월 14일 전라남도 나주(羅州)에서 부친 나종성(羅鍾成)과 모친 밀양 손씨의 4남 4녀 중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호는 송죽(松竹)이고, 이명은 나월한(羅月漢)이다. 1924년 3월 인천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도쿄東京로 건너가 시고쿠四谷소학교 야간부 속성과에 입학하였고, 다시 1년 후 세이죠成城중학교에 다녔다. 이어서 아오야마靑山학원에 입학하여 이홍근李弘根·원심창元心昌을 비롯하여, 송영운宋映運·최학주崔學柱·류치진柳致眞 등 유학생들과 사귀면서 아나키즘을 접하였다. 상하이(上海)로 건너 가 1930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후원으로 중국중앙육군군관학교에 입학하여 1933년 제8기로 졸업하였다. 졸업 후 난징(南京)의 중국헌병학교와 중국군관학교 교수를 거쳐 중국군 헌병 장교로 근무하였다. 이때 아나키스트 단체인 남화한인청년연맹(南華韓人靑年聯盟)에 참여하여 활동하다가 일본 경찰에 붙잡혔다. 국내로 잡혀오던 중 칭다오(靑島) 부근 해상에서 호송 경찰에게 술을 권해 방심케 한 다음 바다로 뛰어내려 탈출하였다. 중국군에 복무하던 중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본격적인 독립운동에 나섰다. 1939년 말 박기성(朴基成)·이하유(李何有) 등 아나키즘 원리에 입각한 독립운동노선을 지향하는 동지들과 함께 한국청년전지공작대(韓國靑年戰地工作隊)를 조직하였다. 이를 위해 중국 군대에서는 사직하였다. 한국청년전지공작대 대장을 맡아 조직을 이끌었고, 부대장은 중국중앙육군군관학교 10기 졸업생이자 한국국민당청년단 출신 김동수, 정치조장은 이하유, 군사조장은 중국중앙육군군관학교 11기 졸업생 박기성, 선전조장은 한국국민당청년단 출신 이해평(李海平, 일명 이재현)이 맡았다. 대원으로는 조시제(趙時濟, 조소앙의 장남)·김원영(金元英, 한국특무대독립군 출신)·현이평(玄以平, 현익철의 조카)·김인(金仁, 김구의 장남) 등이 참여하였다. 이후 한유한(韓悠韓)(일명 한형석)이 예술조장, 이재현이 공작조장으로 활동하였다. 창설 초 30여 명 정도로 시작하여, 한국광복군 제5지대로 편성될 시점에는 100여 명을 넘었다. 결성 직후인 1939년 11월 18일 충칭(重慶)을 떠나 산시성(陝西省) 시안(西安)으로 이동하여 시안시 이부가(二府街) 29호에 본부를 설치하고, 중국군 제34집단군과 연계하여 활동하였다. 이들 중 일부는 타이항산(太行山)으로 파견되어, 중국군 제27군을 도와 정보수집 등의 활동을 벌였고, 나머지 대원들은 시안을 근거지로 삼아 일본군 점령 지역에 침투하여 100여 명이 넘는 한인을 모집하는 등 싼시성(山西省)·허난성(河南省) 일대와 화북지역을 무대로 큰 전과를 올렸다. 또 중국군과 항일전투에 직접 참여하기도 하였다. 이때 유창한 일본어로 일본군 포로들을 설복시켰고, 우리말 방송과 우리글 선전문건 등을 이용하여 일본군 점령 지구에 있는 한인들을 항일독립운동 전선에 합류시켰다. 한국청년전지공작대는 기관지로 『한국청년(韓國靑年)』을 발간하였다. 활동 경비 마련과 중국군 지원, 중국군민과의 유대 강화를 목적으로 하는 연극 공연을 하였다. 연극 공연이 열릴 때 주임을 맡아 대회를 총괄하였으며 배우로도 활약하였다. 1940년 5월 20일부터 10일간 시안 장안성 남원문(南院門) 가설 극장에서 「국경의 밤」, 「한국의 한 용사」, 「아리랑」 공연을 하였는데, 「국경의 밤」에서는 일본 초병의 배역을 맡았고, 이하유·배아민이 ‘한국혁명군’, 전영이 ‘동북의용군’, 현이평이 ‘일본 군관’ 역할을 하였다. 이밖에도 다양한 역할을 소화하며 항일 선전활동에 동참하였다. 한국청년전지공작대 대원들은 중국 제34집단군 태항산유격대 정훈부에 배속되어 일본군 점령 지역 내에 거주하는 한인 청년들을 대상으로 초모(招募) 활동을 벌였다. 모집한 한인 청년들은 시안으로 후송되어, 제34집단군 중앙전시간부훈련단 제4단 내에 개설한 특과총대학원대(特科總隊學員大) 한국청년훈련반(韓國靑年訓練班)(약칭 ‘한청반’)에서 군사훈련을 받았다. 3개월간의 훈련을 마친 청년들은 중국군 소위로 임관되는 동시에, 한국청년전지공작대 대원으로 편입되었다. 한청반은 2개 구대로 편성되었고, 독립적으로 운영되었다. 한국광복군 제5지대로 편성된 후에는 지대장으로 이들의 운영을 총괄하였다. 1941년 1월 1일 신년 단배식이 끝난 후, 시안시 이부가에 있는 한국청년전지공작대 본부 대강당에서는 제5지대 성립식이 거행되었다. 한국광복군 제5지대장으로 대원들을 대표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건국방략에 위배된 행동을 하지 않으며, 한국광복군 공약을 준수하며, 한국광복군 명령에 절대 복종하며, 직무에 충실하여 조국광복운동에 지성을 다하여 희생적으로 헌신하기를 맹세한다”고 선서하였다. 광복군 제5지대장에 임명되면서 징모 제5분처 주임위원도 겸임하였다. 제5지대는 한국청년전지공작대 대원들을 골간으로 하고, 이들이 모집하여 한국청년훈련반에서 군사교육과 훈련을 받은 인원들로 구성되었다. 편성 당시 간부는 지대장 나월환, 부지대장 김동수, 정훈조장 이하유, 훈련조장 박기성, 공작조장 이재현 등이었다. 이후 제5지대는 주로 일본군 점령지역을 무대로 초모·선전·첩보·유격전을 전개하였다. 한국청년전지공작대의 합류로 광복군의 군사력이 크게 증강되었다. 한국광복군 제5지대 대장으로 활동하며 일제의 식민통치를 받고 있는 현실을 가리켜, “30여 년 전 극악무도한 일본제국주의에 의해 강제 점령당한 뒤, 국가의 독립을 상실하였으며, 삼천리 강산은 자본주의의 소비시장과 원료 공급지로 변했으며, 일본제국주의자들의 동아시아 대륙침략의 교량지로 전락하였다. 잔인하게 경제·정치·군사 방면에서 착취당했으며, 3천만 동포들은 자유와 생존권을 박탈당했다”고 지적하였다. 이 같은 현실을 극복해야 할 책임을 지고 있는 ‘한국청년’들이 짊어진 역사적 임무는 첫째,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는 것이며, 한국 땅에 있는 모든 일본제국주의의 세력을 몰아내는 것이었다. 나아가 독립과 자유가 보장된 국가를 건설하는 것이고, 식민지 노예 생활에서 3천만 동포들을 해방시켜 평화롭고 행복한 생활을 실현하는 것이라고 강조하였다. 이를 위한 당면과제는 중국의 항일전쟁 승리에 기여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즉 중국이 일본군과 싸워 승리할 때 한국의 독립도 기대할 수 있는 것이라고 본 것이다. 중국과의 공동 항일전을 수행하고 아나키즘을 수용한 것도 ‘항일’과 ‘독립’이라는 보편적인 과제 달성을 위한 하나의 방략 내지 방편으로서 이해한 측면이 강하였다. 이처럼 활발한 활동을 펼치던 중 동지들에게 희생되어 최후를 맞게 되었다. 이른바 ‘나월환 암살사건’은 1942년 3월 1일 제5지대 본부에서 발생하였다. 3·1절 기념식을 마친 후 후종난(胡宗南) 부대에서 제공한 영화관람권을 대원들에게 나누어주던 중, 동료 대원들에게 살해되었다고 한다. 며칠 뒤에 제5지대 본부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현재의 시안시 연호구(蓮湖區) 연호공원(蓮湖公園) 안에 있는 폐쇄된 우물 속에서 나월환의 시신이 발견되었고, 1년 전에 행방불명된 현이평의 시신도 함께 발견되었다. 지대장의 사망으로 인해 광복군의 주력부대로 성장해가던 제5지대는 구심점을 잃었을 뿐 아니라, 광복군 전체에 큰 동요와 혼란을 초래하였다. 핵심 간부들이 중국 당국에 붙잡혀 활동이 마비됨으로써, 광복군 제5지대의 활동은 크게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김원봉(金元鳳)이 이끌던 조선의용대의 광복군 합류에 맞춰 같은 해 4월 1일 기왕의 제1지대·제2지대와 통합하여 제2지대로 재편되었다. 함께 항일전에 참여했던 중국인 장교의 회고에 따르면 “(나월환은)세 나라 언어(한국어·일본어·중국어)에 능통하며 일본 국내사정에 밝을 뿐 아니라 중국 각지에서 중국의 항일투쟁을 위해 노력하였으며, 한국의 국권회복을 위해 다년간 활동한 인물로 ‘작달막하지만 단단한 몸집’의 소유자로 열정으로 가득 찼으며, 그의 언행에는 한국혁명건아의 특질이 잘 드러난 인물이었다” 라고 하였다. 논저로는 「우리들의 임무(我們的任務)」(『(韓國靑年)』 창간호, 1940. 6. 20), 「어떻게 한국무장부대를 건립할 것인가(怎麼建立韓國武裝部隊)」(『(韓國靑年)』 제1권 제2기, 1940. 9), 「일치 협동하여 혁명을 완성하자(協同一致完成革命)」(『(韓國靑年)』 제1권 제3기, 1941. 6. 15), 「건군, 건국(建軍), (建國)」(『(韓國靑年)』 제1권 제4기, 1941. 8) 등이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한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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