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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振宇

振宇

1883. 3. 10 ~ 1950. 12.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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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金振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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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 영월(寧越)임시정부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강원도 영월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지도에서 보기 →

관련 단체

  • · 서화미술회
  • ·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 · 서화협회
  • · 건국동맹

포상 정보

  • · 애족장(2005)

관련 사건

  • · 국민대표회의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2005) 1883년 3월 10일 강원도 영월군(寧越郡) 서면(西面) 후탄리(後灘里)에서 아버지 김준경(金駿卿)과 어머니 전주 이씨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강릉(江陵)이고, 호는 일주(一洲)이다. 이명은 금강산인(金剛山人), 그리고 한자가 다른 김진우(金辰宇·金鎭宇) 등이다. 부친과 유인석(柳麟錫)의 문하에서 의병 활동을 한 것으로 이야기되나 확인되지 않는다. 일찍부터 서화 실력이 뛰어났는데, 서울 종로에서 서화상을 운영하면서 서화미술회(書畫美術會)에서 공부하여 묵죽(墨竹)이 신문에 보도되기도 하였다. 1919년 서화 연구를 위해 중국으로 건너갔다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하였다. 1919년 7월 베이징(北京)을 거쳐 상하이(上海)로 건너가, 평소 알고 지내던 이필주(李弼周)를 만나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에 참여하게 되었다. 8월 18일에 시작된 임시의정원 제6회 회기 중 임시의정원 강원도 의원으로 보선되었다. 현순(玄楯)·정인과(鄭仁果) 등과 함께 상임위원회 제7과(청원징계)와 제8과(교육실업)에 소속되어 활동하였다. 의원 임기 동안 임시헌법과 관제 개정 토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그 해 11월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강원도 영월 조사원으로 임명되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국내의 실태를 파악하고, 독립운동을 펼칠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조사원을 각 지역에 배치하였다. 1921년 2월 국민대표회의 소집을 제창하기 위한 격문인 「아(我) 동포에 고(告)함」을 발표할 때, 김창숙(金昌淑) 등과 함께 서명하였다. 이 격문에서 국민대표회의를 통해 통일적이고 강력한 정부조직을 수립하고 대중적 방책과 힘을 집중하여 독립운동의 최고방침을 세워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1921년 3월 임시의정원 의원직 사면(辭免)청원을 하였지만, 수리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후 의원직을 사직하고 상하이를 떠나 귀국길에 올랐다. 1921년 6월 경 안둥현(安東縣)에 도착하여 중국배를 타고 압록강을 건너 신의주로 이동하였다. 신의주에서 기차를 타고 서울로 향하던 중인 6월 9일 일제 경찰에게 붙잡혔다. 1921년 7월 19일 평양지방법원 신의주지청에서 이른바 ‘정치에 관한 범죄 처벌의 건’으로 징역 3년을 받았다. 이에 항소하였으나, 그 해 8월 26일 평양복심법원에서 기각되었다. 다시 상고하였지만, 같은 해 9월 29일 고등법원에서 최종 기각되고 형이 확정되었다. 해주감옥 서흥분감에서 옥고를 겪다가 1923년 5월 17일 풀려났다. 1924년 11월에는 박용태(朴龍泰)가 주도한 대종교진흥회의 부회장으로 참여하여 대종교의 포교와 교리서 발간, 강연 등에 관여한 바 있었다. 1925년 11월 1일 백암 박은식(朴殷植)이 상하이에서 사망하자, 신석우(申錫雨)·정인보(鄭寅普)·이상재(李商在)·안재홍(安在鴻) 등 32명과 함께 추도회를 발기하였다. 국내에서 진행된 박은식 추도회는 11월 18일 서울 종로 중앙기독교 청년회관에서 거행되었다. 이와 함께 김창숙과 홍명희 등 민족운동가와 서신을 주고받으며 독립운동가들과의 관계를 이어나갔다. 한편 1925년을 전후한 시기부터 예술가로서 본격적인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 시기부터 서화협회의 간사로 활동하고,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하는 등 본격적인 예술 활동을 전개해 나갔다. 1936년 12월 일제가 소위 ‘조선사상범 보호관찰령’을 공포하면서, 예비검속으로 구금되곤 하였다. 1944년 8월에는 건국동맹(建國同盟)에 참여하였다. 건국동맹은 1944년 10월 국내외 독립운동 세력을 규합하여 민족통일전선을 형성하고 해방정국을 준비하기 위해 여운형(呂運亨)을 중심으로 조직된 독립운동 비밀결사였다. 이 때 건국동맹의 조직을 전국적으로 확대하기 위해 힘을 기울였다. 1945년 8월 15일 광복 이후에는 조선인민당 감찰위원장과 사회노동당감찰위원 등을 역임하며, 정치활동을 전개해 나갔다. 1946년 조선인민당의 간부로 재직 중 조선공산당과의 합당에 반대하는 서명을 하였다. 1948년 7월 26일 발표된 “남북조선의 분열이 고정될 위기를 지적하고 조국의 위기를 선명함”이라는 「330 문화인 성명」에 참여하였다. 한국전쟁 당시 인민군에 붙잡혀 강제로 관직에 임명되어 서울이 수복된 후, ‘한강을 건너지 않은(未渡江)’ 저명 인사라는 명목으로 당국의 조사를 받게 되었다. 이에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어 조사를 받던 중 1950년 12월 24일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양인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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