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正默
正默1888. 12. 9 ~ 1944. 4. 19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 · 통일책진회
- · 한중호조사
- · 대독립당조직북경촉성회
- · 입적간민회발기주비회
- · 의열단
포상 정보
- · 애국장(1991)
관련 사건
- · 국민대표회의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국장(1991) 1888년 12월 9일 경상북도 선산군(善山郡) 고아면(高牙面, 현 경상북도 구미시 고아읍) 원평동(元坪洞)에서 아버지 김수동(金洙東)과 어머니 조남운(趙南運) 사이에서 3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자는 국빈(國賓)이며, 호는 해산(海山)이다. 이명은 김규환(金奎煥)이다. 1907년 전후로 벽진(碧珍) 이씨 가문의 이우숙(李愚淑)과 혼인하였다. 1911년 장인 이덕후가 동문인 성주 출신의 이승희(李承熙)를 방문하기 위해 북만주 밀산(密山)의 한흥동(韓興洞)으로 향할 때, 처남 이우필과 함께 보필하여 함께 이동하였다. 한흥동은 이승희가 1909년 겨울부터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하기 위해 개척한 한인 마을이었다. 장인 이덕후는 귀국하였지만, 이때 이우필과 한흥동에 남아 블라디보스토크 등 연해주 지역에서 노동을 하며 이승희를 도왔다. 1913년 7월 경 당시 독립운동 진영의 내분과 이에 따른 권업회(勸業會)의 활동이 위축되면서 이승희가 한흥동을 떠나 서간도의 접리수(接梨樹) 방면으로 이동하자, 국내로 귀국하였다. 1914년경 베이징(北京)으로 건너가 북경법정전문학교(北京法政專門學校) 법률과(法律科)에 입학하여, 법률을 공부하고 1918년 졸업하였다. 졸업 후 베이징 지역에 거주하고 있던 한인들의 교육에 힘썼다. 1918년 4월경 만주와 훈춘(琿春) 등지를 다니면서 정재관(鄭在寬)과 함께 독립의식을 고취하는 한편, 독립전쟁 준비에 힘을 기울였다. 이 때 펑톈(奉天, 지금 선양)에서 만난 장진홍(張鎭弘)과 이국필(李國弼) 등에게 하바롭스크로 이동하여 군사 훈련을 지시하였다. 이와 함께 가족들을 펑톈으로 이주시키고, 동북지역 중국 군벌인 장쭤린(張作霖) 군의 군법처장 직책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장쭤린이 일제에 동조하여 재만한인을 탄압하자, 이에 반발해 장쭤린 군을 떠나 베이징 지역으로 이동한 것으로 보인다. 1919년 4월 11일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던 시기 상하이(上海)로 이동하여 백남규(白南圭)·김창숙(金昌淑) 등과 함께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활동하였다. 1919년 4월부터 1920년 3월 3일까지 임시정부 장정과 각종 조례 의결, 임시헌법 개정, 국무위원과 임시의정원 의원의 보선임 결정을 하는 등 활발하게 의정활동에 참여하였다. 임시의정원 의원직을 사직한 후 베이징으로 이동하였다. 베이징에서 유시언(柳時彦)·최용덕(崔用德) 등과 함께 집의학교(集義學校)를 설립하고 한인 학생들을 교육하며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데 힘을 기울였다. 1921년 1월 베이징에서 신채호(申采浩)·김창숙과 함께 『천고(天鼓)』 발간에 동참하여 독립사상을 고취하는데 노력하였다. 『천고』 는 일본 제국주의의 야만성과 동양평화 교란을 고발하는 한편, 항일무장투쟁과 한·중항일연합전선 결성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등의 기사를 게재하였다. 1921년 5월 신채호 등과 함께 북경통일책진회(北京統一策進會)를 발기하고 취지서를 발표하여 임시정부의 개혁을 촉구하는 한편, 혈전을 통한 독립을 주창하였다. 1922년 12월 말, 상하이에서 개최될 예정인 국민대표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김창숙·김대지(金大池)·정인교(鄭仁敎) 등 3명과 함께 상하이로 출발하였다. 하지만 국민대표회의에 참가한 사실에 대해서는 정확히 확인되지 않는다. 1923년 8~9월 경 베이징에서 중한호조사(中韓互助社) 사원으로서 한·중 인사들의 상호 교류와 협력관계를 도모하였다. 1924년 7월에는 북경한교동지회(北京韓僑同志會) 조직에 참여하였다. 1925년 하얼빈(哈爾濱)으로 이동하여 펑톈군 제3군사령부 법무장교를 역임하였다. 이 때 의열단(義烈團)과 관계하며, 김창숙이 주도한 이른바 ‘제2차 유림단사건’을 후원하였다. 제2차 유림단사건은 만주나 몽골에 독립운동 근거지를 건설하여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고자 하였던 김창숙이 1925년 8월 입국하여 1926년 3월까지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며 군자금을 모금한 사실이 드러나 많은 유림이 투옥되었던 사건이다. 1926년 10월 한국유일독립당북경촉성회(韓國唯一獨立黨北京促成會) 결성에 참여하고, 선언서에 서명하였다. 해당 촉성회는 민족혁명, 대독립당 결성을 촉구한데서 비롯된 단체로, 한국의 절대독립과 민족혁명의 유일전선 결성, 전 세계 피압박 민족의 단결 등을 목표로 하였다. 이와 함께 1926년 11월 베이징 한인들이 추진한 입적간민회발기주비회(入籍墾民會發起籌備會)에 참여하여, 만주지역 거주 한인들의 사회·경제적 권익을 옹호하고 생활 안정을 도모하였다. 1929년 지린성(吉林省) 이란현(依蘭縣) 주둔 중국 동북군(東北軍) 제19여단 사령부의 군법처장을 역임하며, 만주지역에 거주하는 한인들의 사회·경제적 권익을 옹호하기 위해 힘을 기울였다. 그러나 1931년 9월 일제가 만주를 침공하자 동북군계 군직에서 물러난 후, 중국 관내 지역으로 이동하였다. 1932년에 설립된 중국 군사위원회 베이핑분회(北平分會)의 법무관으로 재직하며, 해당 조직이 해산되는 1933년 5월까지 활동하였다. 이 때 이러한 정치적 위상을 배경으로 의열단이 주도한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朝鮮革命軍事政治幹部學校)의 설립과 운영을 지원하였다. 이후 베이징에서 독립운동을 지속하던 중 1939년 7월 18일 일제 경찰에게 붙잡혀 같은 달 22일 함경북도 경찰부로 호송되어 옥고를 겪었다고 한다. 베이징에서 머물던 중 1944년 4월 19일 57세로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196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양인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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