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인명사전 - 한국독립운동정보시스템
1918. 11. 12 ~ 1945. 3. 29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한국국민당청년단
- ·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
- · 한국청년전지공작대
포상 정보
- · 애국장(1990)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국장(1990) 1918년 11월 12일 황해도 해주군(海州郡)에서 김구(金九)와 최준례(崔遵禮)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적지는 해주군 백운방(白雲坊) 텃골(基洞)이다. 본관은 안동(安東)이고, 이명은 김동산(金東山)이다. 동생은 김신(金信)이다. 1920년 할머니 곽낙원(郭樂園)을 따라 중국 상하이(上海)로 건너가 1924년 1월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에는 할머니 밑에서 동생과 함께 지냈다. 1926년 할머니가 동생 신(信)을 데리고 귀국하였고, 이듬해 아들(김구)과 손자의 곤궁한 생활을 걱정한 곽낙원의 분부를 따라 고향인 안악으로 돌아왔다. 하루가 멀다 하고 일본 경찰이 찾아와 할머니께 아버지(김구)가 중국 어디 있는지 말하라고 윽박지르기도 하고, 자신과 동생을 일본으로 데려가 공부시키겠다고 협박당하였다. 이러한 사정을 알게 된 김구가 비밀리에 사람을 보내 세 식구는 다시 중국으로 나왔다. 1934년 곽낙원은 송화(松禾)에 사는 동생 병문안을 간다고 둘러대고, 작은 손자 신을 데리고 신천·재령·사리원을 거쳐 평양에 도착하였다. 이때 숭실중학에 재학 중이었는데 함께 안둥(安東, 현재 중국단둥(丹東))행 직행열차에 올랐다. 다렌(大連)에서는 “어린 동생과 늙은 할머니를 모시고 위해위(威海衛)의 친척집에 의탁코자 한다”고 둘러대어, 일본 경찰의 조사를 피하였다. 상하이에 와서 안공근(安恭根)의 집에서 하룻밤을 지내고, 다시 자싱(嘉興)의 엄항섭(嚴恒燮)에게 도착하여, 난징(南京)에서 온 김구와 재회하였다. 1934년 2월 중국육군군관학교 낙양분교 내에 개설된 김구 주도의 한인특별반(韓人特別班)에 입교하여 교육받았다. 그러던 중 운영의 최고책임자인 김구와 총교관인 지청천 사이에 갈등이 생겨, 1934년 8월 김구 계열 입교생 중 24명과 함께 퇴교하였다. 이들은 난징성안 동관두 32호에 설치한 학생훈련소에 수용되었고, 영어·중국어 등의 교육을 받았다. 한인청년들을 모집·수용하는 과정에서도 주요 역할을 하였고, 학생총감독 엄항섭 등과 대원들을 감독·보호하였다. 1934년 8월 노태준·안춘생·고시복·최덕신·김동수 등과 같이 중국중앙군관학교 10기생으로 입교하였다. 왕형(王衡, 본명 안춘생(安椿生))을 비롯한 학생훈련소 소속 대원들은 김구의 또 다른 청년 수용조직인 한국특무대독립군 소속 대원들과 함께 1935년 10월 결성된 한국국민당 산하로 편입되어, 1936년 7월 그 전위조직인 한국국민당청년단(韓國國民黨靑年團)을 조직하였다. 이후 이들은 김구 특무활동의 중추적 세력으로 성장하였고, 그 과정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안공근의 장남인 안우생(安偶生) 등과 ‘김구파 청년조직’으로 결성된 한국국민당청년단의 선전기관지 『한청(韓靑)』을 발간하였다. 1936년 가을 안우생·이해평 등과 광저우(廣州)로 가서 『한청』을 발간하는 한편, 중산대학(中山大學)에 재학 중인 한인학생 등을 상대로 선전활동을 전개하였다. 1937년 2월에는 광둥지역의 한국국민당 활동기반 구축을 목적으로 안우생·김창남 등과 한국청년전위단을 결성하였고, 같은 해 9월 한국국민당청년단과 통합하였다. 이후 안우생·한도명(韓道明) 등과 당시 광저우에 있던 김붕준(金朋濬)의 장남 김덕목(金德穆)을 비롯하여 중국군관학교 낙양분교 한인특별반 졸업 후 광저우에서 김구의 통신원으로 활동 중인 마초군(馬超軍) 등과 협력하여, 현지 한인청년들을 한국국민당으로 규합하는 데 힘을 쏟았다. 또한 한국국민당청년단 상하이지부를 결성하여 정보수집 활동을 벌이는 한편, 기관지 『전고(戰鼓)』를 통해 중국인을 상대로 한 반일 항전의식 고취에도 진력하였다. 1937년 12월 난징이 함락된 후에는 임시정부과 함께 창사(長沙)·광저우·류저우(柳州) 등지를 거쳐 쓰촨성(四川省)의 치장(綦江)·충칭(重慶)으로 이동하였다. 안공근·안경근·안정근·안우생 등과 함께 홍콩을 거점으로 당원모집과 반일선전, 정보수집 활동을 지속하였다. 1939년 2월 류저우에서 결성된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韓國光復陣線靑年工作隊)에 참여하였다. 벽보 부착, 합창과 연극 공연 등을 통한 선전활동을 통해 김동수·박영준·노복선·이재현·이하유·지달수·민영구 등과 중국인을 대상으로 항전의식 고취와 한·중 연대의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그 해 5월경 치장에 도착한 다음 이하유·이재현·김동수 등과 당시 중국군 헌병장교로 복무 중인 나월환·박기성 등과 한국청년전지공작대(韓國靑年戰地工作隊) 조직에 착수하였다. 같은 해 11월 11일 충칭에서 30여 명의 대원들로 한국청년전지공작대를 결성하기에 이르렀다. 중국 정부의 전시 수도인 충칭에 도착한 이후 난징에서 피난 온 중앙대학에 진학하여 학업과 독립운동을 병행하였다. 1940년 안중근의 동생인 안정근(安定根)의 딸 안미생(安美生)과 결혼하여 딸 효자(孝子)를 두었다. 하지만 습도가 높고, 안개가 짙으며 매연이 심한 충칭의 공기로 인해 폐병에 걸렸다. 그리고 일본군 점령지역에서 첩보활동을 벌여온 긴장감이 병을 키웠다. 아내 안미생이 시아버지 김구를 찾아가 페니실린을 구해 달라고 하였으나 김구는 아들에게만 구해줄 수 없다고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결국 1945년 3월 29일 폐병으로 사망하였다. 김구는 『백범일지』에 “큰아들 인이도 역시 폐병으로 사망하였으니, 알고도 불가피하게 당한 일이라 좀처럼 잊기 어렵다”고 회한을 남겼다. 충칭 남안(南岸) 화상산(和尙山)의 할머니 곽낙원 묘소 옆에 묻혔다가, 1948년 8월 8일 동생 신에 의하여 이동녕·차리석·곽낙원·최준례의 유해와 함께 서울로 봉환되어 정릉에 이장되었다. 뒤에 남양주로 이장되었다가, 1999년 4월 9일 할머니 곽낙원과 함께 대전현충원 애국지사 제2묘역에 안장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한상도⋮
국어사전
원문에서 어려운 낱말을 선택하거나 직접 검색해 보세요.
낱말을 검색하면 뜻풀이가 여기에 표시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