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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원

金庸源

1892. 2. 26 ~ 1934. 6.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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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김용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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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대전(大田)임시정부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충청남도 대전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지도에서 보기 →

관련 단체

  • · 대동단
  • · 철혈단
  • · 대한민국 임시정부
  • ·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포상 정보

  • · 애국장(1990)

관련 사건

  • · 의친왕 상하이 망명 시도 사건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국장(1990) 1892년 (음)2월 26일 충청남도 대전군(大田郡) 기성면(杞城面) 원정리(元亭里)에서 김도의(金道義)와 은진 송씨의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경주(慶州)이고, 자는 중옥(仲玉·中玉), 호는 강산(剛山)·무이천(無二天)이다. 이명은 김기중(金基中)·백상열(白相悅)·금강산(金剛山·金江山)·송무용(宋武用) 등이 있다. 어릴 때 집에서 한학을 배웠으며, 1912년 상경하여 중동학교에 입학하였다가, 이듬해 4월 다시 휘문의숙에 입학하여 1916년 3월 졸업하였다. 1919년 만세운동 이후 실천적이고 투쟁적인 방법을 모색하던 중 8월 이면호(李冕浩)의 소개로 대동단(大同團)에 입단하였다. 그 해 11월 9일 밤 전협(全協)·나창헌(羅昌憲)·동창률(董昌律) 등과 의친왕(義親王) 이강(李堈)을 상하이(上海)로 망명시키는 작업에 착수하였다. 이강의 망명을 통해 일제의 한국 강제 병탄의 부당성을 세계에 알리자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 이때 이강의 망명에 반대하는 심복 정운복(鄭雲復)을 제압·감시하는 역할이 주어졌다. 그리하여 이강 일행은 수색역에서 안둥(安東, 현 단둥)행 열차에 올라탔고, 이후 이들은 안둥역에 하차하였으나 일제 경찰에 붙잡혔다. 전협(全協)·최익환(崔益燥)·정남용(鄭南用) 등 관련 인물들도 잇달아 붙잡혔다. 한편 이강 일행의 승차를 확인한 후 나창헌과 함께 정운복을 끌고 북문 밖 외딴집에 은신하였다. 대전 집에 은거하면서 논산·공주·금산 일대 부호를 상대로 군자금을 모집하고, 1920년 3월 말 김우승·이덕화와 신의주로 가서 배편으로 안둥현으로 건너갔다. 다시 배를 타고 상하이로 가서 먼저 도착한 나창헌(羅昌憲)을 만났다. 1920년 11월 나창헌·노무용(盧武用)·김재희(金載熙) 등과 철혈단(鐵血團)을 조직하였다. “우리의 독립은 총과 칼과 피가 아니면 성공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앞으로 간 한 사람이 남을 때까지 최후의 일각까지 철(鐵)과 피([혈(血)]로써 간악하고 악독한 왜의 원수를 무찔러야 한다”, “독립운동을 수단으로 지방의 힘과 사당(私黨)을 심어 세력을 다투고 서로 암투를 하며 왜적을 무찌르는 것보다 동족(同族)을 적으로 모는 일에 열중하는 무리”들을 제거함으로써, “전 민족의 정신을 건전하게 하며, 밖으로는 총과 피로써 왜적을 무찔러 우리의 독립을 달성하고자 한다”고 선언하면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초기 독립운동가를 표방하며 임시정부에 모여든 명망가적 인물들에 대한 비판과 경계 입장을 밝혔다. 1921년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의원에 선임되었고, 경무국원(警務局員)으로 활동하였다. 같은 해 11월 태평양회의외교후원회 간사가 되었다. 1922년 2월 임시의정원 의원을 사임하고, 무장투쟁 방안을 구상하였다. 집안 동생인 김태원(金泰源)·김노원(金魯源)과 김정철(金正哲) 등과 쓰촨성(四川省)까지 가서 양산(楊森) 주석을 만나 강무당(講武堂) 입학을 타진하고, 다시 상하이로 돌아왔다. 일제 자료에 따르면, 이 무렵 상하이에서 김가진(金嘉鎭)의 아들인 김의한(金毅漢)과 함께 생활하였다. 김가진·나창헌·김의한 등 대동단 단원들과의 인연을 이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1923년 1월 6일 손두환(孫斗煥)·김동식(金東植)과 한단(邯鄲)의 산시(陝西) 제1군 강무당에 입학하기 위해 상하이를 출발하였으나 입학은 성사되지 않았다. 이러는 사이 늑막염에 걸려 베이징(北京)에 있는 병원에 입원하였다. 이를 눈치 챈 일본 경찰은 고향에 있는 동생 김덕원을 베이징으로 보내 1924년 4월 귀국시켰다. 8월 서울로 올라와 오근영(吳根榮, 일명 오영[吳英])과 만나, 수원의 이규연(李圭淵)을 찾아가 ‘백상열(白相悅)’이라는 가명으로 임시정부 독립공채를 내보이며 군자금 헌납을 요구하였다. 이규연의 신고로 붙잡혔고, 동대문경찰서에서 조사를 받았다. 그런데 조사 과정에서 4년 전 이강 상하이 망명 기도 사건에 참여했던 사실이 드러났다. 1924년 11월 3일 재판에서 징역 2년을 받고 항소를 포기하였는데, 병이 재발하여 11월 7일 병보석으로 일단 풀려났다. 건강이 회복되자 동지들과 다시 항일활동 계획을 모색하던 중, 1927년 1월 20일 다시 붙잡혀 공주형무소에 갇혔다. 이후 이른바 강도교사죄가 추가되어 2년 6월로 늘어났으나, 병이 재발하여 3월 15일 병보석으로 풀려났다. 이후 건강이 다소 회복되자, 일본 경찰이 1928년 10월 25일자로 형집행정지 조처를 취소하여 11월 8일 은신해 있던 부여군 은산면 금공리 이덕재(李悳在)의 집에서 붙잡혔다. 하지만 압송 도중 호송하는 순사를 때려 기절시키고 도주하였다. 이후 청양·부여·논산 등지에서 은신하며 상하이로의 망명을 모색하던 중 붙잡혀, 11월 21일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었다. 이 일로 12월 27일 공주지방법원에서 1년 6월을 추가로 받았다. 잔여 형량에 합쳐 5년 2개월여 만인 1934년 2월 병보석으로 풀려났으나, 그 해 6월 13일 사망하였다. 「강산사실기(剛山事實記)」·「무이천고(無二天稿」·「취설(恥說)」·「몽견초패왕(夢見楚覇王)」·「결석(缺席)도 기념(紀念)」·「사당(砂糖) 발림」·「워싱턴(華盛頓) 좌우명」 등의 글을 남겼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한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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