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상목
南相穆1876. 4. 12 ~ 1908. 11. 4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이강년 의병부대
- · 남상목 의병부대
- · 김군필 의병부대
포상 정보
- · 애국장(1990)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국장(1990) 경기도(京畿道) 광주군(廣州郡) 낙생면(樂生面) 하산운리(下山雲里, 현 성남시 분당구 하산운동) 출신이다. 1876년 4월 12일 아버지 남보희(南普熙)와 어머니 전주 이씨(李氏)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의령(宜寧)이고, 의령 남씨의 시조인 밀직공(密直公) 남군보(南君甫)의 24세손으로 부정공파(副正公派)에 속한다. 자는 문일(文一), 호는 동천(東泉)이고, 초명으로 한자가 다른 남상목(南相睦)을 사용하였다. 유교를 가학으로 삼았던 집안의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소학, 효경, 논어, 고문 주역 등을 배웠고, 주역에 조예가 깊었다. 또한 임진왜란 때 공신이었던 문중 충장공(忠壯公) 남이흥(南以興)의 병서와 역학에도 관심이 많았다. 1904년 5월경 러일전쟁이 발발하면서 일본의 침략이 노골화되며, 일제의 침략 정책은 광주군 낙생면 하운산리 일대까지 미쳤다. 청계산 기슭 ‘드물골’에 울창한 원시림 수목이 있었는데, 이것을 군용으로 쓰기로 결정한 것이다. 일본군의 강요로 낙생면·언주면(彦州面)·돌마면(突馬面) 주민들은 나무를 베고 나르는데 동원되었으나, 혹사만 당하고 노임을 받지 못하였다. 이러한 상황에 크게 분개하고, 일본인 감독관 나가이(中井)를 폭행하였다. 결국 일본 헌병대에 붙잡혀, 매질과 고문을 받은 후 풀려났다. 이 사건을 계기로 일본에 대한 반감이 더욱 커졌으며, 민족의식이 성장하였다. 1907년 8월 군대의 강제 해산 이후 전국적으로 의병이 봉기하자 거병하여 경기도 용인군(龍仁郡) 용천곡(龍泉谷) 일대에서 주둔하며 활약하였다. 의병 약 50여 명을 이끌고 있었으며, 구식총 40여 자루와 서양 총 10여 자루를 소지하고 있었다. 이때 해산된 시위대의 군인이었던 김재선(金在善)을 좌익장(左翼將), 강춘선(姜春善)을 후군장(後軍將), 송주상(宋柱祥)과 김태동(金泰東)을 종사(從事), 김경화(金景化)와 이시영(李時永)을 포군(砲軍)으로 임명하였다. 이들은 서울에서 전국에서 봉기한 의병 소식을 듣고 합류한 자들이었다. 부대를 재정비한 후 1907년 8월 초순 약 30여 명의 의병을 통솔하여 김군필(金君弼)이 이끄는 의병부대와 함께 충북 음성(陰城) 지역에 있던 일본군과 교전하였다. 이 전투에서 사상자가 많이 발생하였지만, 항일투쟁을 지속하였다. 이어서 경기도 죽산군(竹山郡) 칠장사(七長寺)로 이동하여 전봉규(全奉奎)가 이끄는 의병 100여 명과 함께 경기도 안성군(安城郡)의 경찰서를 공격하였다. 일진회 송병준(宋秉畯)의 집과 우편소를 습격하는 데 앞장섰으며, 임옥여(任玉汝)·방인관(方仁寬)·윤관문(尹官文) 부대와 함께 일본군과 교전하였다. 충북 청안군(淸安郡, 현 괴산군 청안면) 근처에 있는 탄동(灘洞)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다는 기록을 보아 활동 범위가 경기도 용인에서 충북 충주 일대까지 펼쳐있던 것으로 보인다. 1907년 9월에는 부대를 이끌고 이강년 의병부대에 합류하여 조령전투에 참전하였다. 1908년 8월, 가족을 만나기 위해 고향으로 내려가던 중 송병준의 아들 송종헌(宋鐘憲)의 밀고로 수원군(水原郡) 인근 광악산(光岳山) 주변의 ‘느릿골’에 잠복 중인 일본 헌병에게 붙잡혔다. 광주(廣州)경찰서로 이송되었다가,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고, 이어진 고문으로 장이 파열되기 까지 하였다. 결국 이것이 원인이 되어 1908년 11월 4일 옥중에서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1983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남기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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