盧允彦
允彦1880 ~ 미상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대통령표창(2008)
관련 사건
- · 성천군 성천면 3.1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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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표창(2008) 평안남도 성천군(成川郡) 대곡면(大谷面) 지동리(芝洞里) 출신이다. 자료에 따르면 1919년 당시 40세로, 1880년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성천군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가 붙잡혀 고초를 겪었다. 평안남도 동남부에 위치한 성천군은 동쪽은 양덕군(陽德郡), 동남쪽은 황해도 곡산군(谷山郡), 서쪽은 강동군(江東郡), 남쪽은 황해도 수안군(遂安郡), 북쪽은 순천군(順川郡)과 맹산군(孟山郡)에 접하고 있다. 기독교세보다 천도교세가 더 컸던 성천에서의 독립만세시위는 천도교계에 의해 주도되었다. 1910년대 천도교의 교세가 가파르게 상승하였는데, 성천에서도 천도교인이 급속히 늘어나 1만여 명을 헤아렸다. 1919년 3월 4일 오전 11시, 천도교 성천대교구 앞에서 천도교인을 중심으로 4,000여 명 이상이 참가한 독립선언식에 참여하였다. 이 날의 대규모 시위는 천도교 성천대교구장인 이돈하(李燉夏)가 1919년 2월 하순 평양에서 열린 대교구장회의(大敎區長會)에서 천도교중앙총부가 김상열金(商說)을 통해 보낸 독립선언서를 입수한 것을 계기로 천도교 지도자들이 계획한 것이었다. 독립선언식에서 주도자들은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독립만세를 부른 후 태극기를 나누어주었다. 시위대가 거리 행진을 하면서 헌병대로 몰려갔을 때 헌병대 정문에서 기다리던 헌병과 헌병보조원 10여 명이 총을 쏘았다. 그 자리에서 28명이 즉사하고 70여 명이 부상당하였다. 또한 시위 군중에게 중상을 입었던 성천헌병분대 분대장도 사망하였다. 이처럼 다수의 사망자와 부상자가 발생하자 일제는 평양에서 헌병 하사 이하 8명과 보병 장교 이하 20명을 오전과 오후에 나누어서 각각 파견하였다. 이날 시위 현장에서 붙잡혔다. 이후 평양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고 항소하였지만, 1919년 7월 3일 평양복심법원에서 기각되었다. 다시 “나는 한일합병 이래 동양의 한 나라가 흠결(欠缺)하여 정립(鼎立)의 기세를 잃어버린 것을 한탄했고, 만세를 부른 것은 조선 사람의 의무를 행한 것이다”라는 취지로 상고하였으나, 그 해 9월 18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8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김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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