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盧允吉

允吉

1885. 12. 4 ~ 1976. 1.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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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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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남 진남포(鎭南浦)3.1운동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평안남도 진남포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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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애족장(1992)

관련 사건

  • · 진남포부 신흥동 3.1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1992) 1885년 12월 4일 평안남도 진남포부(鎭南浦府) 한두리(漢頭里)에서 태어났다. 평안남도 남부에 위치한 진남포부는 용강군에 둘러싸여 있으며, 1897년 10월에 개항한 신흥도시로 1919년 현재 인구의 30% 가량이 일본인이었다. 진남포의 독립만세시위는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인 이승훈(李昇薰)에 의해 준비되었다. 이승훈은 이른바 ‘105인 사건’으로 함께 옥고를 치른 임치정(林蚩正)이 진남포에 살면서 광무소(鑛務所)를 경영하고 있어 자주 방문하였다. 이승훈이 1919년 2월 중순 진남포에 내려와 덕원루(德原樓)라는 음식점에서 임치정과 당시 삼숭학교(三崇學校) 교장인 홍기황(洪基璜) 및 김정민(金正民) 등과 만날 때 함께 참석하였다. 이 자리에서 이승훈은 독립만세시위가 준비되고 있음을 알리고 진남포에서도 속히 준비할 것을 당부하였다. 2월 28일 이승훈으로부터 평양으로 와 윤원삼(尹愿三)을 만나라는 전보를 받고 급히 평양으로 향하였다. 윤원삼으로부터 그날 서울에서 이규갑(李奎甲) 목사 편으로 도착한 독립선언서 500매를 받아 진남포로 돌아왔다. 진남포에서 만세시위 계획은 서울·평양과 같이 3월 1일 오후 2시를 거사일로 잡고 신흥동(新興洞) 감리교회에서 고종(高宗) 봉도식(奉悼式)을 구실삼아 독립선언식을 거행하기로 하였다. 삼숭학교 교사 조두식(趙斗植)과 홍기주(洪箕疇) 등은 학교에서 독립선언서를 등사하고 태극기를 제작하였다. 신흥동 감리교회 간부인 최병훈·오최석(吳最錫)·조대순(趙大淳)과 삼숭학교 교사인 이겸로(李謙魯)와 송영환(宋永煥) 등은 교인 동원의 책임을 맡았다. 이때 부두미곡중개조합(埠頭米穀仲介組合)의 조합원들을 동원하는 책임을 맡았다.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신흥동 감리교회 마당에 500여 명의 군중이 모여 고종 봉도식을 끝낸 후, 독립만세시위를 시작하였다. ‘대한독립’이라고 쓴 깃발을 세우고 태극기를 나누어 주자 군중들은 독립만세를 외쳤다. 시위대는 거리로 나와 행진을 시작하였다. 중심가에 도착하자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진남포경찰서를 향하여 행진하였다. 이때 부두에서 조합원들을 이끌고 시내로 나와 진남포경찰서 앞에서 시위대와 합류하였다. 시위대가 경찰서 앞에서 독립만세를 부르며 시위를 계속하자 경찰이 발포하여 김기준(金基俊)과 그의 부인이 숨졌다. 이 자리에서 70명이 넘는 시위 군중이 체포되는데, 이때 함께 붙잡혔다. 이후 평양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2년을 받고 불복하여 항소하였으나, 1919년 7월 10일 평양복심법원에서 기각 당하였다. 이에 “우리 조선은 반만년의 역사를 지닌 나라로 유사 이래 신성한 민족으로 계승 권세를 누려왔는데 이른바 부자연스러운 한일합병이 성립되어, 공의와 정도에 따라 만세를 부른 것은 죄가 아니다”라는 취지로 항소하였으나, 그 해 9월 25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풀려난 후 1921년에는 『동아일보』 진남포지국장을 맡았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2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김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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