盧文彪
文彪1885. 4. 13 ~ 1950. 10. 30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한인소년병학교
- · 대조선국민군단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정평군 부내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1990) 1885년 4월 13일 함경남도 정평군(定平郡) 부내면(府內面, 이후 정평면) 풍양리(豊陽里)에서 태어났다. 이명은 노훈(盧勳)이다. 1919년 만세운동 당시 기독교인으로 직업은 양복재단사였다. 박용만(朴容萬)이 독립군 양성을 위해 1909년 6월 미국 네브라스카(Nebraska)주 헤이스팅스(Hastings)에 설립한 한인소년병학교(韓人少年兵學校, The Young Korean Military School)를 1912년에 졸업하였다. 이 인연으로 1914년 6월 박용만이 독립군 사관을 양성하기 위해 하와이에 대조선국민군단(大朝鮮國民軍團)을 설립하자, 경리부 부관으로 활동하였다. 이후 군자금을 모집하기 위해 고향인 정평으로 돌아왔다. 부내면 풍양리의 원종집(元鍾潗)을 중심으로 준비된 정평군 만세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1919년 3월 5일 원종집은 자신의 집에서 노용빈(盧龍斌) 등에게 만세시위에 참가할 것을 권유하였고, 3월 6일에는 그와 장예학(張禮學)의 집을 각각 방문하여 이들에게도 만세시위 참여를 적극 권유하였다. 또한 이대관(李大關)과 이종하(李宗夏)에게는 만세시위에서 사용할 태극기를 제작하도록 하였다. 이 과정에서 원종집·장예학·윤화락(尹和洛) 등 부내면의 기독교인들과 함께 부내면의 장날인 3월 7일 만세시위를 주도하기로 결정하였다. 1919년 3월 7일 부내면 풍남리(豊南里)에는 300여 명의 주민들이 집결하였다. 원종집의 선창에 따라 함께 독립만세를 외친 시위대들은 주도자들이 독립선언서의 취지에 대해 연설하자,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이때 선두에서 적극적으로 시위대를 이끌었다. 그러나 출동한 일본군 헌병들의 폭력적 진압에 의해 시위대는 해산되었다. 그 과정에서 주도자인 원종집과 함께 붙잡혀 정평 헌병분견소로 압송되었다. 다음 날인 8일 무혐의로 풀려났지만, 3월 10일 다시 붙잡혀 함흥지방법원 검사국으로 이송되었다. 1919년 4월 14일 함흥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받았다. 이에 불복, 항소하여 그 해 5월 17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원판결이 취소되고 징역 6월을 받았다. 다시 1심과 2심에서 자신에게 발언의 기회를 주지 않고 헌병분견소장의 기록만 가지고 유죄판결을 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주장하며 상고하였지만 같은 해 6월 16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1919년 10월 풀러났고, 이후 베이징(北京)에서 활동하던 박용만과 비밀리에 연락을 주고받았다고 전한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박종린⋮
국어사전
원문에서 어려운 낱말을 선택하거나 직접 검색해 보세요.
낱말을 검색하면 뜻풀이가 여기에 표시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