盧燾容
燾容1878. 10. 10 ~ 1952. 2. 10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건국포장(2005)
관련 사건
- · 파리장서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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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포장(2005) 1878년 10월 10일 경상남도 창녕군(昌寧郡) 대합면(大合面) 평지리(坪旨里)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천여(天汝)이며, 호는 인재(認齋)이다. 노상직(盧相稷) 학맥의 유생이다. 1919년 3월 파리장서에 서명하였다. 1919년 만세운동 준비단계에서 운동의 지도층이 가장 주안을 두었던 것은 만세운동을 전국으로 확산시키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서는 각계각층을 대표하는 인사를 민족대표로 내세우는 것이 중요하였다. 유림에서는 김창숙(金昌淑)이 유력했으나, 결과적으로 민족대표로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유림은 만세운동의 확산에 매우 큰 역할을 하였다. 다수의 유림 인사들이 3월 3일로 예정되어 있던 고종의 인산(因山)에 참여하기 위해 서울에 와 있었는데, 이때 목격한 운동의 분위기를 귀향과 동시에 전파했기 때문이다. 이외에도 유림은 독자적인 방식으로 운동을 조직하였다. 그러한 활동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파리장서운동이다. 서울에서 독립선언서 낭독을 직접 목격한 김창숙은 유림의 주도 하에 독립청원을 진행하기로 결의하고, 영남 유림의 종장이던 곽종석(郭鍾錫)을 운동의 대표로 추대하였다. 김창숙과 뜻을 같이한 김정호(金丁鎬)·이중업(李中業)·유만식(柳萬植) 등은 전국 유림들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각기 지역을 맡아 서명을 수합하는 데 진력하였다. 파리장서는 곽종석 학맥의 장석영(張錫英)·김황(金榥) 등이 기초한 내용에 기호 유림이 작성한 ‘김복한(金福漢)본’의 서명자를 통합하는 형태로 완성되었다. 서명자는 총 137명으로 이들을 가리켜 ‘기미유림단(己未儒林團)’이라고 불렀다. 『면우집(俛宇集)』의 「면우연보(俛宇年譜)」에 의하면 노도용의 서명 순위는 67번째이다. 운동에 참여한 인사들의 회고에 따르면, 청원서 서명자에게는 ‘40세 이상’이라는 연령 기준이 있었다. 이는 혹시 있을지 모르는 일제의 검거로부터 신진 유림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1878년생으로, 4명에 불과한 40세 미만의 서명자 중 한 명이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5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박준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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