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 독립운동가 목록으로

남호연

南浩然

1889. 7. 11 ~ 1939. 4. 24

김판서 캐릭터 이미지

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남호연

김판서는 역사 탐구를 돕는 가상의 AI 문화해설사예요.

추천 질문을 누르거나, 궁금한 내용을 직접 물어보세요.

0/200자
경북 영덕(盈德)3.1운동

지도 위치

시·군·구 대표 지점

이 위치는 경상북도 영덕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지도에서 보기 →

포상 정보

  • · 대통령표창(1992)

관련 사건

  • · 영덕군 영해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대통령표창(1992) 1889년 7월 11일 경상북도 영덕군(盈德郡) 영해면(寧海面) 대동(大洞)에서 태어났다. 1919년 3월 18일 영덕군 영해면 성내동(城內洞)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가 붙잡혀 고초를 겪었다. 영해면의 만세시위는 서울의 만세운동을 목격한 영덕군 교회 조사(助事) 김세영(金世榮)이 주도하였다. 영해면 장날인 1919년 3월 18일 오후 1시, 정규하(丁奎河)·남여명(南汝明)·권영조(權永祚)·박희락(朴羲洛) 등은 만세를 소리 높여 외치면서 만세시위를 시작하였다. 시위대의 선두에서 이상화(李祥和)·조영한(趙榮漢)·김원발(金源發)·김치운(金致雲)·김학이(金鶴伊) 등이 만세를 부르며 행진을 이끌었다. 이때 남병하(南柄夏)·이중식(李仲植)·김치만(金致萬)·박재식(朴載植) 등과 함께 그 뒤를 따르며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시위는 평화롭게 전개되었다. 그러나 영해경찰관주재소의 일본인 주임 순사가 시위대에 해산 명령을 내림에 따라 양상이 바뀌었다. 시위대는 영해주재소의 순사와 순사보를 구타하기 시작하였다. 이어 주재소를 시작으로 공립보통학교, 공립심상소학교, 면사무소, 우체소 등의 시설을 파괴하였다. 시위대 중 일부는 병곡면(柄谷面) 병곡동(柄谷洞)으로 이동하여 주재소와 면사무소를 파괴하기도 하였다. 시위는 이튿날인 3월 19일까지 이어졌으나, 포항의 헌병대와 대구의 보병 연대가 증파되어 시위대 진압에 나섰다. 일제 군경의 실탄 사격으로 인해 시위대 중 8명의 사망자와 16명의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시위대 해산 이후에는 시위 주도자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가 진행되었고, 이 과정에서 붙잡혔다. 1919년 6월 5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소요, 공무집행 방해, 건조물 손괴, 기물 손괴, 공문서 훼기, 상해, 보안법 위반 등으로 징역 6월에 집행유예 3년을 받았다. 대한민국정부는 199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박준형⋮

국어사전

국어사전

원문에서 어려운 낱말을 선택하거나 직접 검색해 보세요.

낱말을 검색하면 뜻풀이가 여기에 표시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