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태우
南泰祐1880. 9. 28 ~ 1937. 8. 7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대호지면 3.1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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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1990) 1880년 9월 28일 충청남도 서산군(瑞山郡) 대호지면(大湖芝面, 현 당진시) 사성리(沙城里)에서 남상우(南相禹)의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본관은 의령(宜寧)이다. 어려서부터 도호의숙(桃湖義塾)에서 한학을 수학하였다. 1919년 3월 이두하(李斗夏)·남계창(南啓昌)·남상직(南相直)·남상락(南相洛) 등 지역 유생들과 함께 서울에서 열리는 고종 장례식에 참여하였는데, 여기서 만세운동을 접할 수 있었다. 고향으로 돌아와 서울에서 일어난 만세시위 소식을 전하였고, 이후 각지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의 열기가 서산 지역에서도 만세운동을 일으키는데 자극제가 되었다. 이러한 유생과 지역 유지의 뜻을 모아 만세운동으로 구체화한 것은 면장 이인정李(寅正)을 비롯한 면사무소 직원들이었다. 1919년 3월 26일 대호지면사무소에서 면서기 김동운(金東云), 강태훈(姜泰壎), 민재봉(閔載鳳)과 면사무소 직원 송재만(宋在萬) 등이 회합을 갖고 만세시위를 일으키기로 뜻을 모았다. 이들은 다음 날인 3월 27일 다시 모여 김동운이 “(장날인) 4월 4일 오전 8시경까지 도로 수선을 위해 면민 각호 1명씩 집합하라는 공문을 작성해 구장들에게 배포하고 정미면 천의시장으로 가서 독립만세를 외치자”라고 실행 방안을 제안하였다. 4월 3일에는 송재만이 9개 마을의 구장에게 도로 수선을 위해 집합하라는 내용의 면장 명의로 된 공문을 전달하며 주민들에게 고지하도록 부탁하였다. 4월 4일 면장 이인정(李寅正)의 지시에 따라 면민들이 도로수선을 위해 집결하였다. 면장 이인정이 모여든 주민들 앞에 나서 “여러분을 모이게 하였음은 도로 수선을 하고자 함이 아니라 조선 독립운동을 일으키고자 하는 것이니 여러분은 이에 찬동하여 조선독립만세를 힘차게 부르며 정미면(貞美面) 천의(天宜) 시장으로 향하라”고 연설을 하였다. 남주원(南柱元)이 서울에서 가져온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다. 한운석(韓雲錫)이 지은 애국가가 이대하(李大夏)의 선창으로 제창되었다. 이어서 면장 이인정의 선창에 따라 주민들은 태극기를 앞세우고 독립만세를 부르며 7km 떨어진 천의 시장을 향해 행진하였다. 장터에 도착한 군중들은 정미면사무소와 경찰관 주재소, 천의시장을 돌며 독립만세를 불렀다. 이때 진압을 위해 출동한 우에하라(上原當定八) 순사와 이재영 순사보 등이 태극기를 압수하고 시위 군중을 향하여 권총을 발사하였다. 격분한 시위대는 우에하라 순사를 붙잡아 구타하였다. 이어서 주재소를 향하여 투석하여 출입문을 파괴하였다. 이때 천의주재소의 응원 요청에 따라 당진 경찰서에서 파견된 무장 경관 니미야(二宮)와 다카시마(高島)는 권총을 쏘며 시위 군중을 제지하여 사상자를 발생시켰다. 이에 주민들과 함께 “어찌하여 우리 일을 막으려 하느냐”하며 결판을 내야한다고 하면서 순사를 포위하였다. 놀란 순사가 도주하자 주민들과 함께 돌을 던졌다. 그 때 주재소 앞 도로에서 순사보 이재영을 만나 “너는 당진의 순사가 아니냐?”고 하며 오른손으로 이재영의 손목을 끌어당기니 그는 묵묵히 서있었다. 이에 다시 그를 끌어당겼으며, 주재소 건물에 돌을 던졌다. 다음 날 새벽 홍성에 주둔한 수비대 1개소대가 대호지에 도착하여 200명에 가까운 인사를 체포할 때 함께 붙잡혔다. 1919년 9월 8일 대전지검 공주지청에서 예심을 마치고, 10월 24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 소요, 출판법 위반, 강도죄로 징역 4년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고 항소하여 이 해 12월 24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으로 감형되어 옥고를 치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86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김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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