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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凞國

凞國

1865 ~ 1909. 12.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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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金凞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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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남 장진(長津)의병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함경남도 장진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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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단체

  • · 양봉익 의병부대
  • · 송상병 의병부대

포상 정보

  • · 애국장(2000)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국장(2000) 함경남도 장진군(長津郡) 동상사(東上社) 원농(元農) 출신이다. 기록에 따르면 1865년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1907년 이후 양봉익(梁鳳翊) 의병부대와 송상병 의병부대에 참여하여 함경남도 지역에서 군수품을 모집하고 부일배를 처단하는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된 이후, 대한제국의 외교권이 박탈되고 통감부가 설치되면서 식민지화가 본격화되었다. 1907년에 접어들면서 헤이그특사사건으로 고종이 강제 퇴위를 당하고, 한일신협약[정미7조약]의 체결로 인해 대한제국의 국운이 풍전등화에 이름에 따라 전국적인 의병항쟁이 전개되었다. 관북지역에서도 이른바 산포수의병(山砲手義兵)이 대대적인 대일 항쟁에 나섰다. 산포수의병은 삼수(三水)·갑산(甲山)·장진(長津) 등 함경남도 전역에서 활동했으며, 의병항쟁 전 시기 동안 가장 강력한 전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 지방에는 산짐승 사냥을 업으로 삼고 있던 산포수가 주민의 상당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1908년 일제가 공포한 ‘총포급화약류단속법(銃砲及火藥類團束法)’으로 인해 민간에서 소지하고 있던 무기류를 압수하였고, 이로 인해 생계 도구를 잃게 된 다수의 산포수들은 반발하다 의병항쟁에 나섰다. 이들 관북지역의 의병들은 압록강과 두만강 부근의 국외 한인사회와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을 뿐 아니라, 일제 군경의 탄압에 의해 활동 근거지를 국외로 이동시키며 장기 항전에 나섰다. 의병항쟁에 투신하기 이전 행적은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1907년 양봉익(梁鳳翼)과 송상봉(宋相鳳) 의병부대에 참여하여 함경남도 장진군 동상사(東上社) 운산동(雲山洞) 일대에서 군수품을 모집하고 부일배를 처단하였다. 이때부터 의병항쟁에 나섰음이 추정된다. 1908년에는 150여 명의 군사들과 함께 삼수 등지에서 일본군과 교전하였고, 그 해 3월에는 장진군 운산동에서 일본군과 접전을 벌이기도 하였다. 빙하산(氷河山)에서도 일본군과 교전했으나 패하였다. 함께 활동한 산포수의병 중 한명인 양봉익은 장진 일대에 큰 세력을 가지고 있었다. 1908년 2월 당시 150여 명을 거느리며 장진 북방의 삼수와 후창(厚昌) 접경지대인 수채동(水采洞) 등지에서 활동하였다. 양봉익은 ‘갑산유장진창의대장(甲山留長津倡義大將)’의 직함으로 1908년 3월 서간도 한인사회의 지도자인 ‘관리사 도주(管理使) (都主)’에게 무기 구입을 후원해 달라는 ‘보고’를 발송하기도 하였다. 송상봉(宋相鳳)은 장진군 본상사(本上社) 저암리(咀岩里) 출신으로 원래 양봉익의 휘하에 있다가 독립한 인물이다. 주로 장진 북방의 몌물리(袂物里) 일대에서 항전을 벌이다가 1908년 8월경 휘하 40여 명을 이끌고 홍범도에게 투신하였다. 이들과 함께 관북지역에서 의병항쟁을 계속하였으나 끝내 일본 군경에게 사로잡혔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활동으로 1909년 고등법원에서 교형을 받았고, 그 해 12월 20일 경성감옥에게 형이 집행되어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노상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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