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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영소

姜永韶

1886. 2. 18 ~ 1934. 8.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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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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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남 강서(江西)미주방면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평안남도 강서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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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단체

  • · 대한인국민회

포상 정보

  • · 독립장(2011)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독립장(2011) 1886년 2월 18일 평안남도 강서군(江西郡)에서 부친 강명화(姜明化)와 모친 송씨 사이의 6남 1녀 중 둘째로 출생하였다. 호는 창해(滄海)이다. 10대에 증산군 공립소학교에서 수학하였으며, 1905년 이전 결혼하였다. 1905년 4월 부친, 형 강영대 부부 등과 함께 하와이 이민을 결행하여 하와이 오아후 섬 에와농장에 배치되어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하였다. 1905년 하와이 에와농장에서 조직된 친목회와 1906년 호놀룰루에서 조직된 공진회 조직에 주도적으로 참가하였다. 이후 곧 미국 본토로 이주한 가족과 떨어져 1910년 10월까지 하와이에서 머무르며 교민 봉사와 민족운동에 진력하였다. 1906년 기독교의 학습인으로 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하였으며 1907년에 세례를 받았다. 1907년 9월 하와이 각처의 한인 단체들이 국권 회복 후원과 교민 사회 발전을 목적으로 한인합성협회라는 새 단체로 통합되자, 총무와 서기 등 중추적인 역할을 맡았다. 1909년 2월 미주의 공립협회(共立協會)와 한인합성협회(韓人合成協會)가 국민회로 통합될 때 하와이 측의 발기인을 맡았으며 국민회 하와이지방총회의 총무로 헌신하였다. 또한, 국민회 하와이지방총회에서 발행한 신한국보사(新韓國報社)의 사무 겸 재무 일과 한인식산흥업회사의 서기 등으로 활동하느라 호놀룰루에서 다니던 학교도 그만두었다. 그러나 다양하고 헌신적인 사회봉사로 건강을 해쳐 1910년 10월 미국 본토로 이주하였다. 1911년 5월부터 1912년 6월까지 샌프란시스코에 위치한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의 신한민보사(新韓民報社) 총무(사무원)로 일하면서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 서기도 함께 맡았다. 또 한인 교회의 청년회장과 권사직을 역임하였다. 1913년 5월 13일 샌프란시스코 페리가(街)의 셋집에서 안창호(安昌浩)의 주도로 흥사단(興士團)이 창립되었는데, 2번 단우로 참여하였다. 1914년과 1915년에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의 총무로서 총회장 이대위(李大爲)를 보좌하였으며, 1916년에는 총회장으로 선임되었다. 30세에 총회장을 맡을 수 있던 것은 공공의식과 책임감이 있고 사무처리 능력이 뛰어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건강이 좋지 않았으며, 집안의 우환도 적지 않았다. 총회장 재임 중 6세 딸이 사망하였고, 부인도 수술을 받을 만큼 건강이 좋지 않았다. 이러한 이유로 1917년도 총회장에 다시 선임되자 바로 사임하였다. 이후 시카고 부근으로 이주하였으며, 부인과 아들은 1918년 초 부친의 귀국에 동행하였으나 부인은 귀국 도중 사망하였다. 3·1운동 직후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 사무원으로 선임되었고, 샌프란시스코로 돌아와 중앙총회의 재무 등을 맡았으나, 곧 하와이 특파위원으로 선임되어 하와이 한인 사회의 통일을 위해 진력하였다. 1920년도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장으로 선출되자, 재정적인 어려움에 빠진 북미총회 재건에 앞장섰다. 국민회에서는 총회장 재임 시 공적을 기려 상여금과 국민회 훈장을 수여하였다. 1921년 6월부터 1년 6개월간 하와이에서 사업을 하다가 1923년 초 강혜순과 재혼하고 시카고에서 김경(金慶)의 도움을 받아 식당업에 진출하였다. 식당이 확장되면서 형제들과 함께 ‘강씨형제 카페테리아 회사(KANG BROTHERS CAFETERIA CO.)’를 설립하여 1931년에는 3개의 식당을 운영할 만큼 성공을 거두었다. 시카고에서도 한인 사회와 민족운동 관련 활동에도 적극적이었다. 대한인국민회 시카고지방회와 시카고 한인교회가 그 중심이었다. 1928년 재만동포문제 대책강구회 위원과 국내 한인수재구제회 서기, 1929년 임시정부 임시재정후원회 위원, 1930년 국내 학생운동을 지원하는 시카고공동회 발기인 겸 재무 등으로 활동하였다. 특히, 1930년 11월 신한민보사 시카고지국을 설치하고 지국장을 맡아 활동하였다. 당시 미국의 2대 도시인 시카고를 중심으로 동부 지역 한인들의 단결과 소식을 기대한 신한민보사의 지국 설치로, 이후 『신한민보(新韓民報)』에는 시카고와 뉴욕 등 동부 한인 관련 기사들이 대폭 증가하였다. 경제적으로 성공하여 단순한 사업가로 그치지 않고, 재정적으로 민족운동을 지원하는 기회를 만들었다. 일찍부터 국민회를 비롯한 민족운동에 가능한 금액을 지원해왔는데, 사업이 성공하면서 더욱 많은 재정 지원이 가능하게 되었다. 특히, 시카고에서는 1930년 전후 대공황 시기였음에도 불구하고 김경과 함께 각종 민족운동이나 한인 관련 행사를 지원하였다. 국민회의 각종 의무금과 지원금을 비롯하여 시카고 한인교회나 신한민보사 지국 등에 소요된 적지 않은 재원을 김경과 함께 부담하였다. 국민회의 실무자로, 지도자로 활동하여 국민회의 후원자로서의 역할에 충실하였다. 1931년 1월 11일부터 샌프란시스코에서 개최된 제22회 국민회 대의원회에 참가하여 송종익(宋鍾翊)·홍언(洪焉)·김동우(金東寓)와 함께 통일문제연구위원에 선임되어 미주 한인 통일 문제를 제안하기도 하였다. 기존의 단체나 당파를 넘어서 민중의 역량을 기초로 한 새로운 미주 한인의 통일을 주장하였는데, 흥사단의 일부에서 이를 문제로 삼기도 하였다. 1920년대부터 흥사단에 적극적인 활동을 보이지 않았고, 적어도 1930년 이전에 흥사단을 탈퇴하였던 것 같다. 통일운동에 적극 관심을 가지고 활동하며 신한민보사 시카고지국을 총괄하고 식당도 직접 운영하다가 1931년 8월 고혈압으로 뇌혈관이 터져 오른쪽 반신불수가 되었다. 간호와 휴양 등으로 건강이 어느 정도 회복되었다가 1934년 8월 26일 운명하였다. 8월 28일 어빙 파크(Irving Park)에 안장되었다. 사후 친구들은 그의 국민회에 대한 부단한 봉사를 기억한다는 비문을 만들어 세웠다. 그를 비롯해서 가족 6명도 모두 독립운동유공자로 포상되었다. 부친 강명화는 애족장(2012), 형 강영대는 애족장(2013), 동생 강영문은 애족장(2012), 강영상은 대통령표창(2013), 강영각은 건국포장(1997)이 추서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1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최기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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