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華植
華植1866. 7. 3 ~ 1943. 4. 2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호좌의병부대
포상 정보
- · 애국장(1995)
관련 사건
- · 전기의병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국장(1995) 1866년 7월 3일 충청남도 보령군(保寧郡) 청소면(靑所面) 진죽리(眞竹里)에서 부친 선전관 한표(漢杓)와 모친 전주이씨 사이에 출생하였다.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자는 중일(仲一)이고 호는 복암(復菴)이며, 김우동(金友東)이라는 이명이 있다. 유인석(柳麟錫)의 문인으로, 1896년 유인석이 거의하여 호좌 의병부대를 결성하자 이에 동참하여 의병항쟁에 투신하였다. 1895년 일제가 을미사변을 일으키고 단발령을 시행하여 국권을 침해하자 유인석은 문인들을 충북 제천군(堤川郡) 장담(長潭)으로 불러 모아 이러한 사변에 어떻게 처신하여야 하는 지에 대해 논의하였다. 유인석은 제자들에게 의병을 일으키는 길, 요동으로 잠시 물러나 후일을 대비하는 길, 굴하지 않고 자기를 지켜 깨끗이 하는 길 등의 ‘처변삼사(處變三事)’를 제시하였다. 이때 스승 유인석과 이정규(李正奎)·이조승(李肇承)과 함께 도해(蹈海)의 길을 선택하며 잠시 고국을 떠나 뒷일을 대비하자고 하였다. 그러나 유인석이 의병을 일으킨 문인 안승우(安承禹)·이춘영(李春永)이 단양군(丹陽郡) 일대에서 전투를 치르고 영월로 패주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거의할 것을 결심하자, 여기에 동참하기로 마음을 돌렸다. 고향인 충남 보령에 있다가 유인석이 제천에서 거의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4, 5백리를 걸어 제천의병에 합류하였다. 이때 격고문을 보고 제천으로 달려온 이들은 유인석을 총대장으로 하는 호좌 의병부대의 일원으로서 본격적으로 의병항쟁을 전개하였다. 이들은 1896년 2월경, 내륙의 요충지이자 군사적 거점인 충주성을 점령하고 충주관찰사 김규식(金奎軾)을 처단하는 등의 전과를 올렸다. 충주성을 점령한 유인석은 「격고내외백관(檄告內外百官)」이라는 격문을 포고하여 관리들에게 의병에 동참할 것을 호소하고, 휘하에 있던 이들을 각지로 파견하여 의병을 모으게 하였다. 그러나 그 해 3월, 관군과 합세한 일본군의 공격으로 결국 충주성을 내어주고 제천으로 패퇴하여 항쟁을 계속하였다. 이후 충북 수안보(水安堡)와 단양 등지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교전하였으나, 관군과 일본군의 총공세로 의병부대가 수세에 몰리자 요동으로의 서행을 결정하였다. 유인석이 다시 한 번 의병을 모아 의병의 전열을 가다듬기 위해 요동으로 망명할 때, 유인석을 수행하며 요동으로 이동하였다. 유인석이 만주 봉천성(奉天省) 류허현(柳河縣) 육도구(六道溝)에 이르렀을 때 충재(充齋) 김영록(金永祿)·안신모(安愼模)·구연상(具然庠)·송환국(宋煥國), 그리고 사환(使喚)과 통사(通事) 5~6명을 포함하여 20여 명과 함께 유인석을 수행하였다. 이후 만주에서 유인석의 명을 받고 원용정(元容正)·이정규 등과 뜻을 함께 하면서 망명지를 근거로 힘을 길러 항쟁을 계속할 것을 주장하였다. 의병부대가 만주 통화현(通化縣)에서 머무를 때 유인석에게 “이곳에는 왕왕 의기 있는 인사들이 있는데다가 토지가 광활하고 식량이 풍족하여 가르침을 베풀 수 있는 곳이니, 이곳에서 동료와 영웅을 규합하여 학문을 일으키고 힘을 길러, 때가 되면 숙원인 토적흥복(討賊興復)을 완수하자”고 권유하였다. 또 유인석을 옆에서 보좌하며 신변을 보호하였다. 제천의병이 처단한 단양군수 권숙(權潚)의 아들 권보상(權輔相)은 고종의 소환으로 유인석이 국내로 돌아온다는 말을 듣고 아버지 원수를 갚고자 유인석을 살해하기 위해 황해도로 이동하였다. 그러나 이를 미리 알아채고 황해도로 온 종사 이조승(李肇承)의 형 이주승(李胄承)한테 이 소식을 전해듣고 유인석의 신변을 보호하였다. 그리고 유인석에게 만주를 중심으로 의병항쟁의 근거지를 마련할 것을 청하면서, 자신이 국내로 돌아가 선배들과 동지들에게 보고하고 국내에서 이 일을 도모하겠다고 하였다. 1896년 말경 국내에 돌아와 동지들과 교류하며 의병봉기를 모색하였다. 1897년 8월 유인석이 환국하라는 고종의 칙명을 받고 국내에 들어와 평북 초산군(楚山郡)에 이르자, “선생이 화를 겁낸다면 소자(小子)들은 어찌 갓을 쓰고 머리를 들겠냐”며 유인석을 만류하였으나 결국 유인석의 말을 따랐다. 의병들은 이 시기 조정의 명령이나 칙유는 의병을 배척하기 위한 것이므로 조정의 명령을 받지 않는 것을 의체(義諦)로 삼았기 때문에 유인석이 칙유를 받고 국내로 들어오는 것을 반대하였다. 한편 유인석의 옆에서 종군하면서 전쟁 중 발표되었거나 오고간 문서 등 의병과 관련된 문서를 모아 정리하였다가, 이후 8권 4책으로 구성된 『소의신편(昭義新編)』을 편찬하였다. 번잡한 부분은 덜어내고 중요한 부분은 간추려 내외편으로 나누어 1899년에 『소의신편』의 편집을 마쳤다. 내편은 유인석의 글을 수록하였으며, 외편은 함께 의병에 참여하였던 동지들이나, 문인들의 글을 실었다. 직접 지은 책의 이름인 ‘소의(昭義)’는 이러한 글들로 인해 춘추대의가 다시 떨쳐 해나 별같이 빛나라는 의미를 지녔다. 이 책을 간행할 때쯤인 1902년, 빠진 문서들을 모아 백삼규(白三圭), 이정규, 차재정(車載貞)이 추가로 『소의속편』 2권 1책을 편집하여 이와 함께 총 10권 5책의 목활자본으로 1,000부를 간행하였고, 그 가운데 일부를 중국으로 보냈다. 이 책은 항일의병에 대한 기록이라는 이유로 일제에 의해 압수되거나 소각되는 등 고초를 거쳐, 광복 이후 1975년에 국사편찬위원회에서 다시 간행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박윤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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