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화서
金化西1886 ~ 미상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정봉준 의병부대
- · 오희원 의병부대
- · 유수만 의병부대
포상 정보
- · 애국장(2014)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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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장(2014) 경상북도 성주(星州) 출신으로, 의병 활동 당시에 충청북도 충주군(忠州郡) 남면(南面)에 거주하였다. 1910년 당시 판결문에 따르면 25세로 1886년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이명으로 김용복(金龍福)을 사용하였다. 사금광부(砂金鑛夫) 출신이다. 정미의병의 초창기부터 항일 투쟁에 참여하여 경기, 강원, 충남 각지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는 한편 의병 활동을 위한 군자금을 조달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1907년 정미의병의 항쟁은 광무황제(光武皇帝)의 강제 퇴위와 대한제국 군대의 강제 해산이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이에 해산 군인들의 항쟁을 시작으로 농민, 유생, 광부, 포수 등 각계 각층이 무장 투쟁에 합류하면서 정미의병이 시작되었다. 1907년 7월 27일 이미 1905년 을사늑약 직후부터 항일 투쟁 중이던 정봉준(鄭鳳俊), (鄭奉俊) 의병부대에 합류하였다. 이 당시 정봉준 부대는 화승총 150자루와 곤봉 50개로 무장한 200여 명의 의병들로 조직되어 있었다. 동료 의병들과 함께 1907년 7월 30일 경기도 죽산군(竹山郡)(현 안성시 죽산면) 백암리(白岩里), 8월 4일 양성군(陽城郡)(현 안성시 양성면) 성미상성동(成未尙成洞), 8월 9일 여주군(驪州郡) 백암리(白岩里), 8월 11일 강원도 원주군(原州郡) 등에서 의병 활동을 위한 자금과 물자를 징발하였다. 8월 21일에는 충북 충주군(忠州郡) 목계(牧溪) 부근에서 동료 의병 100여 명과 함께 일본군 수비대에 맞서 전투를 벌였으나 패전하였다. 이후 자택에 은거하고 있다가, 1908년 2~3월경 다시 오희원(吳喜元) 의병부대에 소속되어 40여 명의 의병들과 함께 활동하였다. 그러나 충남 공주군(公州郡) 대평면(大坪面) 대교리(大橋里)에서 벌어진 일본 수비대와의 전투에서 패전하여 다시 충북 문의군(文義郡)(1914년 청주군에 병합) 서삼도면(西三道面) 상외리(上外里)의 사금(砂金) 탄광에 은거하였다. 1908년 6월 28일 탄광 인근의 유수만(柳須萬)(또는 유순만(柳順萬)) 의병부대에 합류하여 6월 30일 동료 의병인 김용운(金用云)·김재홍(金在弘)·옥치관(玉致寬)·이용기(李用基) 등과 함께 상외리에서 군자금을 징발하였다. 그러나 같은 해 7월 3일 문의군 서삼도면 입암리(立岩里)에서 일본군 수비대의 습격을 받아 다시 사금 탄광으로 몸을 숨겼다. 이후에도 의병 활동을 지속하였으나 결국 1910년 1월 11일 오전 5시경 청주경찰서 부강순사주재소의 순사에게 붙잡혔다. 이 과정에서 저항하여 순사가 휘두른 칼에 여러 곳의 상처를 입었다. 1910년 1월 26일 공주지방재판소 청주지부에서 이른바 강도와 폭동죄 등으로 징역 15년을 받았다. 이후 1914년과 1915년 두 차례에 걸쳐 감형되어 1923년 전후 풀려난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행적은 확인되지 않는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4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여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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