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華白
華白1843 ~ 미상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김율 의병부대
- · 호남창의회맹소
포상 정보
- · 대통령표창(2003)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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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표창(2003) 전라남도 나주군(羅州郡) 출신으로 기록에 의하면 1843년 출생한 것으로 추정된다. 본관은 김해이다. 1907년 군대 해산 이후 나주에서 거의한 김율(金聿) 의병부대에 참여한 뒤, 기삼연(奇參衍)이 중심이 되어 결성한 호남창의회맹소(湖南倡義會盟所)에 합류하여 의병활동을 전개하였다. 1905년 일제에 의해 강제로 을사조약이 체결되어 외교권이 박탈되는 등 국권을 상실할 위기 속에 다양한 항일 단체들이 결성되어 이에 대응하였다. 1906년 영광에서는 기삼연(奇參衍)과 김용구(金容球)를 비롯한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의 문인들을 중심으로 일심계(一心契)가 조직되어 국권회복을 도모할 동지들을 규합하였다. 이어 1907년 한일신협약[정미7조약]과 함께 고종이 강제로 퇴위하고 군대까지 강제로 해산 당하는 등 국권상실이 현실화되자, 전국에서 항일 의병이 일어나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해 갔다. 당시 전라남도에서는 의병장 기삼연(奇參衍)을 비롯하여 김태원(金泰元)·(金準)·김율 형제 등이 의병을 규합하여 활발한 항일 투쟁을 전개해 나갔다. 이때 나주군(羅州郡) 출신의 김율이 거의하자, 이에 호응하여 의병부대에 참여하였다. 1907년 10월 30일 기삼연을 중심으로 영광의 김용구, 나주의 김준과 김율, 장성의 이철형(李哲衡), 함평의 이남규(李南奎) 등이 합세한 호남창의회맹소를 정식으로 결성하였다. 호남창의회맹소의 맹주는 기삼연이 추대되었으며, 도통령에 김용구, 선봉장에 김태원, 중군장에 이철형, 후군장에 이남규가 임명되어 조직을 이끌었다. 김율은 친형 김태원과 함께 호남창의회맹소에 참여하였는데, 후군장에 소속되어 활동하였다. 이때 김율의 지휘 하에 호남창의회맹소에서 전개한 여러 항일 투쟁에 참여하였다. 호남창의회맹소는 조직을 정비한 뒤 주변 지역을 돌아다니며 의병을 모집하는 한편, 군기와 군량을 준비하여 군사훈련 등을 실시하며 1908년 1월 말까지 항일 전투를 치열하게 전개해 나갔다. 뿐만 아니라 곡식의 역외유출 금지를 통해서 지역 주민들의 생존권을 지키고자 하였으며, 방곡과 납세거부투쟁 등을 이끌기도 하였다. 이들은 주로 장성군(長城郡)·영광군(靈光郡)·담양군(潭陽郡)·고창군(高敞郡)·함평군(咸平郡)·무장군(茂長郡) 등 전라도 서부지역을 활동무대로 하였다. 특히 1907년 10월 29일에는 고창성을 공격하여 점령하였으며, 12월 7일에는 법성포 순사주재소를 습격하여 무기를 노획하고, 그곳의 사창을 점령하여 저장되어 있던 양곡을 압수하여 군량미로 이용하였다. 한편 1907년 12월 중순경 기삼연과 선봉장 김태원은 호남창의회맹소를 분진키로 결정하고 기삼연은 장성·순창 지역에서, 김태원은 영광군·나주군·함평군·무안군(務安郡) 지역을 중심으로 독자적으로 활동하면서 의병부대를 강화하기로 하였다. 이때 김율과 함께 김태원 의병부대로 분진하여 소규모의 유격투쟁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일제는 함평군의 연안지역으로 의병을 압박하는 포위 작전을 펼친 끝에 결국 기삼연이 1908년 2월 2일 순창에서 일본군에 기습을 받아 붙잡혔다. 이 소식을 접한 김태원은 날랜 병사 30여 명을 이끌고 기삼연을 구출하고자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기삼연은 재판 없이 총살되었으나, 호남창의회맹소는 다시 김용구와 김태원 등 몇몇 지도부를 중심으로 재편되어 이후에도 일본군과 유격전을 활발히 전개해 나갔다. 기삼연이 붙잡혀 사망한 이후 김율과 함께 김태원 의병부대에서 활동하게 되는데, 전면전보다는 유격전술이나 기습, 유격전을 주로 구사하였다. 이들은 또한 호남창의회맹소의 지향을 계승하여 일제의 침략기구와 징세기관과 친일세력에 대한 공격을 시행하였다. 이때의 활동은 광주부(光州府) 일대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는데, 인근 지역에서 일제 수비대와 헌병대와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그리고 무등산 뒤편 무동촌(현 담양군 남면 무동리)에서 일제의 광주수비대장 요시다 카쓰사부로(吉田勝三郞) 소좌를 사살하였다. 요시다는 ‘의병 잡는 귀신’으로 소문나 있었으며,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당시 많은 전공을 세운 인물이었다. 요시다가 습격해 온다는 소식을 들은 김태원이 매복 공격을 통해 요시다를 사살한 것이다. 이후 소규모 정예 의병을 중심으로 유격전을 펼치던 중 김태원 의병장은 1908년 4월 25일 부하 20여 명과 함께 광주 어등산(魚登山)에서 일본군과 교전 중에 목숨을 잃었다. 그의 동생 김율은 1908년 3월 30일 붙잡힌 뒤 형 김태원의 사망 소식을 듣고 탈출을 기도하다가 역시 죽임을 당하였다. 이후 부대원들의 행적은 확인되지 않는데, 이때 피살된 것으로 추정된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홍동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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