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좌봉
金佐鳳1847 ~ 미상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차도선 의병부대
- · 대한광복단
포상 정보
- · 애족장(2018)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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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2018) 함경남도 갑산군(甲山郡) 회린면(會麟面) 송계리(松溪里) 출신이다. 일제 측 기록에 따르면 1847년에 태어난 것으로 확인된다. 집안 환경과 성장 과정 등은 알 수 없지만 함경도 일대의 군수를 역임하였고, 친형인 김의봉(金儀鳳)도 온성군(穩城郡) 군수를 지냈다. 또한 일제가 유학자들을 포섭하기 위해 만들어진 친일 유교 학회 대동학회(大東學會)의 구성원이었던 것을 고려하면 유학을 가학(家學)으로 하는 양반 집안에서 자랐고 지역을 대표하는 유림 가운데 한 명이었다고 볼 수 있다. 함경도 일대에서 일찍부터 명망이 있었다. 1873년 10월 7일 삼군부(三軍府)에서 북쪽 국경의 요충지였던 나난진(羅暖鎭)을 담당할 권관(權官)으로 지역 내에서 의로운 사람을 임명해야 한다며 적임자라고 상주하였다. 경원군(慶源郡)을 시작으로 1899년 8월 1일에는 갑산군, 1901년 7월 29일에는 울진군(蔚珍郡) 군수를 역임하였다. 1902년 1월 15일에는 길주항(吉州港) 경무관(警務官)으로 임명되었고, 1903년 1월 18일 중추원(中樞院) 의관(議官)이 되었다. 1907년 친일 유림단체인 대동학회(大東學會)의 구성원인 것이 확인된다. 하지만 같은 해 11월 일진회(一進會)와 함께 활동했던 갑산군 군수 김기영(金璣泳)을 배척하는 운동을 주도하여 반일 의식을 명확하게 표명하였다. 1907년 7월 고종이 강제 퇴위 되었고, 한일신협약[정미7조약] 체결 이후 8월 1일 대한제국 군대도 해산되었다. 이러한 일본의 조치에 대해 전국에서 강렬한 반발이 일어났다. 정확한 시점은 알 수 없지만 1907년 11월 무렵 김기학(金基學)과 함께 차도선(車道善)이 이끄는 의병부대 도대장(都大將)이 되었다. 함경도는 일본의 조치에 가장 강하게 저항한 대표적인 지역으로, 의병 활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당시 함경남도 경찰부장 오카다 기스지(岡田宜壽)가 경무국장 마쓰이 시게루(松井茂)에게 보고한 바에 따르면, 함남에서 의병 활동이 왕성한 이유로 “대한제국 군대의 해산과 정미7조약, 1907년 9월 발표된 ‘총포 화약류 단속법’을 근거로 포수(砲手)들의 총을 회수해간 것, 단발 시행과 일진회 회원의 횡포”를 들었다. 이 중 일진회의 횡포는 의병부대 도대장이 되게 한 중요한 원인이었다. 오카다는 당시 군수·면장들이 대부분 일진회 회원 출신이며 이들 대부분은 민간에 단발을 강요하고 민심을 혼란하게 하였고 양반·유학자들은 이것에 반항하여 엽사(獵師)들과 서로 협력한다고 보고하였다. 이때 차도선 의병부대의 도대장으로서 전력을 보강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후치령(厚峙嶺) 인근 포수(砲手)를 모으는 데 앞장서, 약 300여 명의 의병을 모았다. 이후 일본군과 총기를 호송하는 순사를 공격하였다. 또한 폭거를 일삼는 일진회원들을 제거하였다. 차도선 의병부대 인원은 500~600명 정도까지 확대되었다. 1908년 4월 초 북청경찰분서(北靑警察分署)에서는 귀순을 요구하는 서면을 보냈지만, 홍범도(洪範圖)·김기학과 함께 거부 의사를 밝혔다. 또한 서면을 전한 사람을 밀정으로 간주하고 붙잡았다. 활발하게 항일 활동을 전개하던 중 일본 경찰에게 붙잡혀, 김기학·홍범도의 가족과 함께 구류되었다. 일제는 붙잡은 가족들을 앞세워 홍범도·차도선을 귀순시키려고 하였지만, 그러한 의도는 관철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1910년 무렵 일제의 억압을 피해 간도(間島)로 이주한 홍범도와 비밀리에 접선할 계획을 세우기도 하였다. 1910년 강제병합 이후 대한광복단(大韓光復團) 갑산분단(甲山分團)의 분단장(分團長)을 맡았다. 대한광복단은 만주에서 설립된 무장 항일단체였다. 1920년 4월 대한광복단 단원 박형렬(朴亨烈)·이치용(李致龍)이 대한광복단 분단 조직을 위해 국내로 잠입하였다. 이후 갑산군(甲山郡) 회린면(會麟面) 중리 구장 박태화(朴泰華) 등과 만나 분단 조직을 협의하였다. 이 협의 과정에 참여했는지 알 수는 없지만, 1920년 11월 설치된 갑산분단의 분단장을 맡았다. 부단장 김석태(金錫泰), 제1지단장 김내원(金來源), 제2지단장 이신재(李愼在), 제3지단장 박철규(朴哲奎)와 함께 약 60여 명으로 구성된 대한광복단 갑산분단을 이끌었다. 그리고 갑산분단의 분단장으로 군자금 모집, 배일 문서 배포, 간도에 있는 광복단 본부와의 연락, 대한광복단 단원의 국내 잠입에 대한 편의 제공 등의 활동에 앞장섰다. 하지만 대한광복단 분단과 지단의 확산을 막기 위한 일제의 대대적인 압박이 시작되었다. 1921년 4월 정보수집 활동을 벌이던 중 일본 경찰에게 발각되어, 약 120여 명의 갑산분단 단원들과 함께 붙잡혔다. 조사를 받고 이른바 ‘정치에 관한 범죄 처벌의 건’으로 기소되었고, 검사국으로 압송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8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남기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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