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도경
南道京1884 ~ 미상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이강년 의병부대
포상 정보
- · 애국장(2014)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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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장(2014) 충청북도 제천군(堤川郡) 근우면(近右面) 주포리(周浦里) 출신으로 농업에 종사하였다. 1910년 당시 판결문에 따르면 27세로, 1884년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1907년에서 1910년 사이에 이강년(李康秊) 의병부대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1905년 11월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항일의병운동이 전국적으로 전개되었다. 1907년 3월 일제의 한국 침략이 노골화하는 가운데, 1896년 1월 경북 문경군(聞慶郡)에서 의병을 일으켰던 이강년이 제천에서 다시 의병을 일으켰다. 이때 이강년 의병부대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재기한 이강년 의병부대는 1907년 3월 이후 충북 단양군(丹陽郡)·제천군·청풍군(淸風郡)·충주군(忠州郡)·문경(聞慶)과 강원도 원주(原州)·연풍(延豊)·영월(寧越)·횡성(橫城)·강릉(江陵) 그리고 경북 예천군(醴泉郡)·영주군(榮州郡)·봉화군(奉化郡)·안동군(安東郡) 등의 지역에서 의병활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해산 군인들을 중심으로 결성된 민긍호(閔肯鎬) 의병부대와 연합하여 계속되는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기도 하였다. 이강년 의병부대가 본격적으로 의병활동을 시작하기 위해 1907년 7월 15일 부대를 충주 마수막(馬首幕)(마즈막재)으로 이동하여 충주를 공격하고자 시도할 때 부대원으로 참여하였다. 이후 이강년 의병부대의 일원으로 경북 풍기군(豊基郡) 도촌(道村)에서 김기찬(金基燦)과 일진회 회원이었던 김상호(金商虎)를 처단하였다. 1907년 7월 30일에는 경북 문경군 주흘루(主屹樓)에서 일본군과 전투에 참여하였다. 당시 무기가 부족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원주에 묻어 두었던 탄환을 꺼내 전력을 보강한 후, 청풍군의 조동교(趙東敎) 의병부대, 해산 군인들이 의병으로 참여하고 있던 여주군(驪州郡)의 김현규(金賢圭) 의병부대와 연합작전을 벌였다. 같은 해 8월 2일에 초곡(草谷) 전투에서 조동교·김현규 의병부대가 각자 군대를 이끌고 연합 의병부대를 떠나 흩어지고 말았으나, 8월 3일에 혜국사(惠國寺)의 승려들의 도움으로 갈평(葛坪)에서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큰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8월 4일 다시 갈평에서 순검 1명을 총살하였으며 괴성(槐城)에서 일본군 2명을 사살하였다. 이어 8월 중순부터 9월 중순에 이르기까지 충북 단양군 유치(楡峙), 강원 영월군(寧越郡)·병두(屛杜)·연풍(延豊) 등지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으나 전시 상황이 불리하였다. 그러나 9월에 전 정언(正言) 김상한(金商翰), 소모장 주광식(朱光植) 등이 의병을 거느리고 와서 의병부대를 연합하자는 뜻을 보였고 다시 역전의 기회를 잡을 수 있었다. 1907년 9월 16일 제천군 추치(杻峙) 전투와 9월 27일 죽령(竹嶺)에서 일본군을 생포하였다. 이어서 10월 5일에는 단양 고리평(故里平)에서도 일본군을 생포하는 등 승리 분위기가 고양되어 있었다. 겨울이 다가오면서 10월 6일의 소백산정(小白山頂) 전투에서 불리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지만, 10월 23일에 있었던 경북 풍기 백자동(栢子洞) 전투에서 다시 일본군을 붙잡는 전과를 올릴 수 있었다. 11월 21일에 전동(錢洞) 월계봉(月桂峰)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치렀고 12월 3일에는 강원 낭천(狼川)(현 화천) 간척리(看尺里)에서 전투가 있었으며 이어서 12월 5일에 경기 건천(乾川)에서 일본군과의 큰 전투가 있었다. 이렇게 이강년 의병부대에서 충청·경상·강원 지역을 중심으로 활발한 활동을 하면서 군수물자 확보를 위한 활동도 병행하였다. 특히, 1907년 (음)12월 21일 이강년 의병장의 부하 윤대용(尹大用)과 50여 명의 의병과 함께 충북 청풍군 대정리(大靜里)에서 음식물과 기타 물품 등 군수품을 모집하는 활동을 하였다. 1908년 들어서도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전개하였다. 1908년 2월에 경기 용소동(龍沼洞)·대청리(待淸里)·갈기동(葛基洞)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다. 1908년 3월에 강원도 인제(麟蹄) 백담사(百潭寺)와 경북 안동 서벽(西壁)에서, 4월에는 봉화 내성(乃城)과 안동 재산(才山)에서 전투를 벌였다. 이때 이준명(李準明)·정원팔(鄭元八) 외 약 260명의 대부대를 거느리고 산악 유격전을 펼치며 일본군과 치열하게 전투를 치렀다. 4월 경 이강년 의병부대는 부하 의병장인 김상태(金尙台)·변학기(邊鶴基)·정경태(鄭敬泰)·성익현(成益顯)·정연철(鄭連哲) 의병부대 등 4천여 명의 대규모 의병부대를 이루고 경북 일월산(日月山)을 중심으로 서벽(西壁)에서 머무르게 되었다. 그러자 그 소식을 들은 일본군이 영천(永川) 수비대를 파견하여 불가피하게 전투를 치를 수밖에 없었고, 이때 일본군을 체포하고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이강년 의병부대는 일본군과의 전투를 벌이면서 큰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강년 의병장이 1908년 (음)6월 4일 청풍 까치성(鵲城) 전투에서 퇴로가 막히는 바람에 복사뼈에 일본군의 탄환을 맞아 적에게 사로잡혀 제천으로 압송되었고 8명의 의병이 전사하는 피해를 입었다. 이강년 의병장의 체포로 의병활동이 어려워지게 되었던 때에, 동료 의병인 윤대용과 함께 1909년 (음)12월 7일 오후 8시 제천군 남면(南面) 대장리(大壯里)에서 군자금 모집활동을 전개하였다. 이후 군자금 모집활동을 계속하여 1910년 (음)1월 1일 오후 6시에는 윤대용과 함께 제천군 근우면(近右面) 옹당리(翁堂里)에서 군자금을 모집하였다. 같은 달 22일 오후 10시에는 근좌면(近左面) 노목리(老木里)에서 군자금과 군수품을 모집하였으며, 1월 23일 오전 2시에는 근우면 팔송리(八松里)에 사는 이진사(李進士)에게서 군자금과 군수품을 모집하였다. 이러한 활동 중 붙잡혀 1910년 5월 2일 공주지방재판소 청주지부에서 이른바 폭동과 강도죄로 징역 10년을 받았다. 1914년에 징역 7년 6월, 1915년에 징역 6년 6월 3일로 감형 받고 옥고를 치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4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이은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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