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 독립운동가 목록으로

독립운동인명사전 - 한국독립운동정보시스템

1881. 2. 26 ~ 1921. 9. 28

김판서 캐릭터 이미지

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독립운동인명사전 - 한국독립운동정보시스템

김판서는 역사 탐구를 돕는 가상의 AI 문화해설사예요.

추천 질문을 누르거나, 궁금한 내용을 직접 물어보세요.

0/200자
함북 경원(慶源)만주방면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함경북도 경원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지도에서 보기 →

관련 단체

  • · 중광단
  • · 대한정의단
  • · 대한군정서
  • · 대한독립군단
  • · 대한독립군총합부

포상 정보

  • · 독립장(1962)

관련 사건

  • · 청산리전투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독립장(1962) 1881년 2월 26일 함경북도 경원군(慶源郡) 안농면(安農面) 금희동(金熙洞)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이천(利川)이며, 호는 백포(白圃), 초명은 기학(夔學)이다. 이명으로 서희세(徐希世)·서학포(徐學圃) 등을 사용하였다. 부인 채씨와 1남 2녀를 두었다. 함경도의 대표적 유학자 김노규(金魯奎) 문하에서 한학을 수학하였다. 1902년 함북 경성군(鏡城郡) 유지의숙(有志義塾, 함일학교의 전신)을 졸업한 후 소학교 교사로 근무하면서 10년 동안 아동교육에 매진하였다. 1911년 만주로 건너가 본격적인 항일투쟁에 나섰다. 북간도로 건너온 대종교인(大倧敎人)들을 중심으로 1911년 3월 중광단(重光團)을 조직하고 31세의 나이로 단장에 추대되었다. 중광단 창립 초기에는 항일무장투쟁보다는 주로 독립정신과 애국사상을 고취하는 정신교육에 치중하였다. 당시 중광단에 참가한 사람들은 대부분 대종교의 중심인물들로서 백순(白純)·현천묵(玄天默)·박찬익(朴贊翊)·계화(桂和)·김병덕(金秉德)·(金星)·채오(蔡五) 등이었다. ‘중광단’이라는 명칭은 우리 고유의 단군신앙에 대한 부활을 의미하는 대종교의 ‘중광(重光, 교문이 다시 열림)’에서 따온 것이다. 중광단이 조직된 지역은 당시 대종교의 주요 거점이었던 왕칭현(汪淸縣)으로, 이 지역은 대종교에서 1910년 시교사(施敎師) 박찬익을 파견하여 포교의 거점으로 삼았던 곳이다. 이 시기에 북간도로 이주해 온 한인들의 수가 20만 명이 넘었고, 이 중 많은 인구가 대종교를 신봉하였다. 한편, 수전병행(修戰竝行)의 실천방안으로 교육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1912년 왕칭현 덕원리(德源里)에 직접 설립한 명동학교(明東學校)를 위시하여 중광단에서 설립한 동일학교(東一學校)·청일학교(靑一學校)·학성학교(學成學校)·선구학교(船口學校) 등 10여 개 학교에 달하였다. 대종교와 독립운동, 그리고 민족교육이라는 세 요소를 일치시키면서 수전병행을 극대화시켜 나갔다. 1912년 10월 대종교에 입교하여 활동하였다. 입교 후 대종교 제2세 교주 김교헌(金敎獻)과 함께 포교 활동에 매진하여 입교한 지 불과 3년 만에 수만 명의 신자를 확보하는 등 교세 확장에 큰 역할을 하였다. 또한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면서도 항상 수행과 교리연구를 게을리 하지 않을 정도로 대종교에 대한 신앙심이 깊었다. 1919년 5월 중광단은 일부 공교도(孔敎徒)들과 연합하여 대한정의단(大韓正義團)으로 확대·개편되었다. 이때 대한정의단 단장에 취임하여 4대 강령과 7대 규약을 제정하고 본격적인 항일무장투쟁을 위한 준비를 마쳤다. 대한정의단은 독립군 편성을 위한 준비로 각지에서 결사대원 또는 단지결사대원을 모집하여 총 1,037명의 대원을 확보하였으며, 산하 단체로 대한군정회(大韓軍政會)를 조직하는 등 항일무장투쟁을 위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였다. 대한정의단에 대한 정비와 더불어 왕칭현을 중심으로 대종교 정신을 통한 민중적 기반을 확고하게 다져 나갔다. 1919년 7월 대종교 동도본사의 중심 인물인 계화·김붕(金鵬)·김일봉(金一鋒)·정신(鄭信)·김암 등과 함께 일본 내각총리대신 하라 다카시(原敬)에게 서신을 보냈다. 본격적인 항일무장투쟁을 위한 준비를 마치고 일제에게 보낸 일종의 통첩으로 보인다. 이 무렵 대종교 2세 교주인 김교헌이 교통(敎統)을 전수하려 하였으나 항일무장투쟁에 전념하기 위해 5년간 교통 전수를 유보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대한정의단의 주요 인물들은 군사부문에 비전문가로서 항일무장투쟁을 효과적으로 전개할 수 없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김좌진(金佐鎭)·조성환(曺成煥) 등 한말 육군무관학교를 졸업한 군사전문가들이 많은 길림군정사(吉林軍政司)와 연합을 추진하였다. 길림군정사는 김좌진이 항일무장투쟁을 위해 1919년 3월 중순 조직한 독립군단체이다. 길림군정사의 경우는 군사전문가들이 중심이 되어 조직되었으나 이를 뒷받침해 줄 대중적인 지지 기반을 갖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1919년 가을 대한정의단은 길림군정사와 연합하여 대한군정서(大韓軍政署, 북로군정서)로 발전하였다. 대한군정서의 총재를 맡았으며, 부총재는 현천묵(玄天默), 총사령관은 김좌진이었다. 대한군정서의 중앙 조직은 총재부와 사령부로 나누었으며 총재부는 군정서의 대외업무와 행정업무를 담당하였고, 사령부는 군사부분을 담당하였다. 사령부 총사령관 김좌진은 이장녕(李章寧)·나중소(羅中昭) 등과 함께 대한군정서 독립군 양성을 위해 1920년 2월초 왕칭현 서대파(西大坡) 십리평(十里坪)에 사관연성소를 설치하였다. 김좌진은 사관연성소 소장이 되어 신흥무관학교의 도움으로 교관과 각종 교재를 지원받았으며, 이범석(李範奭)·김규식(金奎植) 등이 교관으로 훈련을 담당하였다. 사관연성소는 1920년 9월 9일 제1회 졸업생 298명을 배출하였으며, 이들을 중심으로 300여 명의 교성대(敎成隊)를 조직하였다. 이때 조직된 교성대는 최정예부대로서 이후 청산리전투를 승리로 이끄는 대한군정서의 주축이 되었다. 1920년 10월 청산리전투에 참전했던 대한군정서 간부는 총사령관 김좌진, 참모부관 나중소, 부관 박영희(朴寧熙), 연성대장 이범석, 종군장교 이민화(李敏華)·김훈(金勳)·백종렬(白鍾烈)·한건원(韓建源), 대대장서리 겸 제2중대장 홍충희(洪忠憙), 제1중대장서리 강화린(姜華麟), 제3중대장 김찬수(金燦洙), 제4중대장 오상세(吳祥世), 대대부관 김옥현(金玉玄) 등이었다. 청산리전투 후 대한군정서 총재로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김좌진 부하 600명과 홍범도 부하 300여 명이 일본군 1,300여 명을 격살”하였다고 보고하였다. 청산리전투는 한국독립군이 벌인 전투 중에서 대승을 거둔 대표적인 전투였다. 청산리전투에서 대패한 일제는 대종교도를 비롯한 한인들을 무차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에 동포들의 희생을 최소화시키고 장차 연해주로 이동하기 위한 전략으로 대한군정서를 소만(蘇滿) 국경지역인 밀산(密山)으로 이동시켰다. 그러나 밀산은 한인사회의 재정적 기반이 취약한 곳이라 독립군이 장기간 주둔하기에 적합하지 않았다. 독립군 지도자들은 러시아지역인 연해주로 이동하여 체제를 정비하고 새로운 항일무장투쟁 방략을 모색하고자 하였다. 1920년 12월 밀산현 평양진(平陽鎭)에 집결한 독립군 단체는 대한군정서·대한독립군·간도대한국민회·대한신민단·군무도독부·의군부·혈성단·야단·대한정의군정사 등이다. 이들 독립군단의 지도자들은 연해주로 이동을 결정한 후 밀산에 집결한 10여 개의 단체를 통합하여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이라는 하나의 통일된 독립군단을 결성하였다. 대한독립군단 조직은 3개 대대로 구성된 1개 여단을 두었으며, 1개 대대는 3개 중대, 1개 중대는 3개 소대로 구성되었다. 1개 소대의 인원은 27명이었으며, 병력은 3,500명에 달하였다. 이때 대한독립군단의 총재로 추대되어, 부총재 홍범도(洪範圖), 고문(白純)·김호익(金虎翼), 외교부장 최진동(崔振東), 참모부장 김좌진, 참모 이장녕·나중소, 군사고문 지청천(池靑天) 등과 함께 지휘부를 구성하였다. 그 외 제1여단장 김규식, 1여단장 참모 박영희, 제2여단장 안무(安武), 2여단장 참모 이단승(李檀承), 제2여단 기병대장 강필립, 중대장 김창환(金昌煥)·오광선(吳光鮮)·조동식(趙東植) 등이 함께 하였다. 1921년 1월초 대한독립군단은 연해주와 흑룡주(黑龍州, 아무르주) 일대에서 활동하던 문창범(文昌範) 등의 도움을 받아 소만 국경인 우수리강을 건너 이만을 거쳐 연해주로 대이동을 시작하였다. 1921년 1~2월초 이만에서 만주에서 이동해 온 독립군 부대들과 연해주지역 독립군부대 3,000여 명이 대한의용군총사령부(일명 대한총군부)를 조직하고 군사 통일을 실현하였다. 대한의용군총사령부 조직당시 홍범도·최진동과 함께 참모부원으로 선출되었다. 1921년 3월 14일 노령 소추풍령에 집결한 독립군은 1,000여 명에 달하였는데 밀산에서 결성된 대한독립군단을 다시 대한독립군총합부로 재편하였다. 이때 대한독립군총합부 총장을 맡았고, 부총장 한춘운(韓春雲), 군무부장 김좌진, 외교부장 최진동, 서기 박래순(朴來順), 경리부장 홍범도, 서기 이홍래(李弘來), 비서과장 채묵(蔡黙), 정찰과장 서인극(徐仁極), 모연부장 김성지(金星地)가 선출되었다. 대한독립군총합부는 니콜스크에서 러시아 과격파와 연맹하고 인쇄기 2대를 구입하여 문서를 인쇄하여 선전활동을 전개하였다. 홍범도·김좌진 등은 친일파 처단과 군자금 모금을 위해 부하 5명을 경성·평양·의주·원산·청진 등지로 파견하였다. 이들은 국내로 잠입하여 한인 형사와 친일파 조사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1921년 4월 12일 이만에 모인 독립군 단체 수뇌들은 다시 독립군대회를 열어 대한의용군총사령부를 ‘대한독립단’으로 개칭하고 체제를 정비하였다. 그러나 대한독립단은 당시 흑룡주 일대를 장악하고 있던 러시아 원동 정부의 공동 항일투쟁 제안에 반대하여 김좌진 등 대한군정서 계열 독립군들이 이만을 떠나게 됨으로써 해체되고 말았다. 대한독립군단의 일부 부대는 1921년 3월경 자유시에 진주하였으나 지휘부는 줄곧 이만에 있었다. 홍범도·최진동을 비롯한 대한독립군단 지도자들이 일제와 러시아 홍군세력의 중간지대인 이만으로부터 전로고려공산당의 기반인 자유시로 지휘부를 옮긴 것은 1921년 5월 중순경이었다. 이때 김좌진·이범석 등 북로군정서 지휘부는 자유시로 가지 않고 이만에서 밀산으로 되돌아왔다. 한편 최진동·지청천·안무 등 대한독립군·군무도독부·서로군정서 계열은 공산 세력의 제의를 받아들여 자유시로 불리던 알렉세예프스크로 이동하였다. 그러나 여기서 1921년 6월 이른바 ‘자유시참변’을 겪게 되었다. 자유시참변은 러시아에 거주하고 있는 한인들로 구성된 부대와 간도지역에서 이동한 독립군이 고려혁명군정의회(高麗革命軍政議會)와 대한의용군(大韓義勇軍)으로 나뉘어져서 벌인 군권쟁탈전의 소산이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재만독립군 주력부대가 소속해 있던 대한의용군은 러시아 적군 제29연대에 의해 무장해제를 당하였고, 그 과정에서 지청천을 위시하여 수많은 독립군이 체포·감금되는 등 다수의 희생자가 생겼다. ‘자유시참변’으로 인해 독립군이 막대한 타격을 입고, 노령 국경 부근인 밀산에서 재기를 위해 군사 훈련을 하던 중 1921년 9월 당벽진에서 수백 명의 토비들이 야습하여 살인, 방화 그리고 약탈을 자행하였다. 이로 인해 진중이 초토화되고 훈련 중이던 수많은 청년 병사들이 희생당하자 다음날 독립군 지휘자로서 책임을 지고 자결을 결심하였다. 스승인 나철(羅喆)이 순명삼조(殉命三條)를 남기고 1916년 9월 16일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 때를 마음에 새기면서, 1921년 9월 28일 나철의 유서(遺書) 한 구절을 읊조리면서 41세의 나이로 자결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이동언⋮

국어사전

국어사전

원문에서 어려운 낱말을 선택하거나 직접 검색해 보세요.

낱말을 검색하면 뜻풀이가 여기에 표시돼요.